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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실은 해방이후 북한과 소련 그리고 중국의 관계를 사실위주로 정리했다. 사실의 정리는 이후 공부하는데 중요하다. 박영실이 정리한 내용을 요약하고자 한다.
먼저 북한과 소련과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다.
1945년 8월 15일 소련 극동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챠코프, 북한주민들에게 해방군으로서의 소련군과 건설자로서의 북한주민과의 관계를 강조
1945년 8월 24일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도착
1945년 8월 26일 소련군 본대 3,000 명이 평양에 진주, 점령지배기구를 설치, 민정, 군 정치부와 군 경무사령부 및 정치고문기관 그리고 미정기관을 활용하면서 북한사회의 전 영역에 걸쳐 개입, 간섭
1945년 11월 27일 소련군 사령부의 명령으로 소련 전문가들이 북한지역에서 공장의 재건과 개발을 시작
1945년 10월 12일 소련군 사령관의 성명서에 따라 북한 지역의 각종 치안 조직 및 무장조직이 해산, 각 도 인민위원회는 보안대가 설치
1945년 11월 5도 행정국의 보안국장에 최용건이 취임, 각 도의 보안대를 관할하는 보안국 만들어짐
1946년 1월 무장경비조직인 철도보안대를 창설
1946년 3월 전문적인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준비하였던 중앙보안간부학교가 7월에 정식으로 개교
1946년 8월 15일 보안간부훈련소 간판하에 보안간부훈련대대부가 설립,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로 군사지휘구조를 일원화
1947년 5월 17일 인민집단군을 만들어 정규군 면모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군을 선포
소련군 주둔과정에서 북한지역 일부공장 설비와 물자가 소련으로 수송되는 등 북한지역의 생산품이 약탈
1947년 – 1950년 6월 까지 9천만톤의 우라늄이 소련으로 운반
1948년까지 북한에서 연해주까지 철도 건설을 추진, 소련내 부족한 물자 공급시도
상기한 내용과 함께 북한 정권 창설에 참가한 세력들을 다음 세가지고 정리하고 있다.
1 중국에서 활동안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의용군
2 소련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다.
우선 동북항일연군은 항일유격대, 빨치산파, 만주산등으로 불린다. 학자들마다 부르는 기준이 다르다.
박영실은 북한 정권에 참가한 이들을 그들의 활동지역에 따라 만주파, 연안파, 소련파로 지칭하고 있다.
만주파, 동북항일연군
동북항일연군을 중심으로 한 만주파의 대표가 김일성이다.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 일본의 토벌작전으로 소련으로 이동하여 1942년 7월 소련극동전선군 88독립보병여단으로 재편된 것이다.
당시 극동군 사령부는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 후보자로 추천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3년동안 소련군대에서 정치 군사훈련을 받았고 이과정에서 그의 리더십과 계략이 뛰어나다고 판단했으며, 1930년대 중국과 만주국경지대에서 중국공산당원으로 항일투쟁을 했을분 조선공산당의 종파투쟁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용건, 김책, 강건, 김일)
연안파, 조선의용대
연안파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이 주도하던 민족혁명당의 군사조직으로 주로 중국화남지역에서 활동했다.
내부분열로 대원상당수가 이동했고 1941년 무정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용대화북지대로 개편
조선의용대화북지대는 1942년 화북조선독립동맹이 조직되면서 산하의 무장조직으로 편재되면서 조선의용군으로 개칭
한반도 해방이후 1945년 10월 초 조선의용군은 신의주 대안 안동현에 도착하여 한인 신흥상업학교에서 조선의용군압록강지대를 결성
소련군에 의해 단체 입국이 거절된 이후 1945년 12월 무정, 김두봉, 최창익 등 70여명만 개인자격으로 입북
(최창익, 박일우, 무정, 김두봉)
소련파
소련군 사령부는 1945년 11월 소련국방인민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민정담당부사령관직제를 도입하고 이를 운영하기 위해 소련파 472명을 선발하여 북한에 파견
(허가이, 강상호, 남일, 박창옥)
상기 세세력을 중심으로 북한의 정권이 창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립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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