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발발이후 중국은 북한에 대한 지원을 적극적으로 실시한다. 전쟁결정과정에서 김일성은 대만을 우선시한 마오쩌뚱에게 부정적이었지만 전쟁이 시작되면서 중국의 지원을 환영한다.
중국은 다양한 상황을 고려한 대비책을 강구했다.
먼저 미국이 38선을 넘어 진격한다면 인민군 복장을 한 지원군을 구성해 미국에 대항할 것임을 강조했다. 당시 동북지역에 3개군단 12만명의 병력이 집결되어 있었다. 중국이 동북변방군의 설립을 정식으로 결정한 것은 7월 13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을 내리기 며칠전에 저우언라이는 소련측에 그런 생각을 이미 이야기 했다.(372, 주52)
7월 4일에는 이미 중국 정보총국 국장 조우따펑은 어떻게 하면 산동반도 항구를 통해 조선군을 남한으로 이동시킬 수 있고, 중국의 군사전문가를 남한의 전쟁터로 보내 인민군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도 고민할 정도였다. (372, 주 53)
7월 12일 조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중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임을 통보했다.
“중국은 미국이 조선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중국정부는 이 전쟁에서 조선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에 10만분의 1, 20만분의 1, 50만 분의 1 비율로 제작된 지도 각 500장씩을 제공하고 전선의 상황을 통보해주고 인민군 군복 견본을 가능한 한 빨리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373, 주 56, 주은래연보, 상권 p.51.)
김일성는 중국의 이런 지원에 반색했던 것 같다. 김일성은 즉각 이런 상황을 소련대사에게 보고하면서 “이미 미국 등이 이승만 편에서 전쟁에 참가했으니 체코슬로바키아, 중국 등과 같은 민주국가들도 자신들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해주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7월 19일 김일성은 베이징의 북한대표와 마오쩌뚱간 회담내용을 소련대사에게 보고했다.
“마오쩌뚱은 미국이 장기적으로 참전할 것이며 조선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적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주력부대를 정돈할 것을 제게 제안했으며, 조선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제공하기로 승락했습니다. 만약 조선이 지원을 원하면 중국은 군대를 파견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이미 4개군단 32만면의 병력을 준비해놓고 있으니 8월 10일 이전에 의견을 표명할 것을 바라고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으로부터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뚱과 스탈린이 이문제데 해서 이미 협의를 실시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오쩌뚱은 이 문제에 대해 스탈린과 충분한 토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구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중국의 개입은 미군이 38선을 넘어서 진격하는 경우라고 말했다(이 근거를 찾아 보아야 함). 소련의 지원으로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다면 굳이 중국의 지원까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일성도 스탈린의 이런 구상을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중국의 지원제안에 적극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태도가 달라졌다. 중국대사관에 제공하는 정보도 방송의 수준을 넘지 않았다. 중국 무관부 요원을 인민군 부대에 파견하여 참관하게 해달라고 하는 요구도거절했다. 중공군과 같이 싸웠던 연안파 간부들도 엄격하게 통제받고 있었다. 이와함께 중국군이 조선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참모단을 파견하겠다는 계획도 거부당했다. 조우언라이는 소련대사에게 북한이 동의하지 않아서 참모단을 제대로 파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АВПРФ, Хронология основных событий кануна, сс.52-54)
상기내용은 Goncharov의 Uncertain Partner, p.163)에도 기술되어 있다.(확인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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