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과 두만강을 한만국경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과거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세웠던 만주국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평향이 함락되자 김일성은 사령부를 제1차로 희천, 제2차로 강계로 이동시켰다.
제1차 방어선을 안두 던천서, 제2차 방어선을 희천선, 제3차 방어선을 강계선으로 했으나, 한국군 제2군단이 제2차 방어선을 돌파하고 한만국경인 초산을 첨령했다.
동해지구의 북한군은 함흥을 빼앗긴 후 장진, 갑산, 성진 방면으로 북상하여 재편을 시도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군이 규합한 병력은 79,000명으로 포50문 전차 자동포 약 62대 정도로 추산되었다.
(그렇게 밀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정도 병력과 장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한다.)
퇴각중 강제모집을 하여 구성인원의 7-80%는 전투경험이 없는 신병이었다.
북한은 만주 길림성 반석에서 보낸 보병 3개사단으로 제7군단을 창설하고
이 기간중 강건군사학교가 평북시중으로 후퇴했다.
영변 훈련소는 남한 출신 지원병으로 편성, 527부대로 호칭하고 만주로 후퇴했다.
12사단은 만포진 지구, 제3사단은 박천을 거쳐 강계로 후퇴했다.
제7사단은 강계군 대동면까지 후퇴
제37사단은 충청북도 청주에서 창설, 만주 길림성 지구까지 퇴각
제23여단은 영원지구로 후퇴, 제24여단은 강계지구로 후퇴, 25여단은 사영경유 성진으로 이동
해군 군관학교 예하 3개 대대를 편성 나진으로 이동함
1950년 10월 북한군 항공사령부는 동북만주로 이동
10월 26일 17:00 중공군은 상호방위협정의 이행과 동양제일의 수풍댐을 장악하기 위해 신의주 삭주 단포진으로 약 4개군 병력 12만명이 개입
북한군은 신천-구성, 강계-장진, 나진-무산 선에서 중공군 4개군의 진입을 계기로 병력을 수습하고 총반격 태세를 준비하고 있음
이번 내용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내용이 있다.
만주 길림성 반석에서 3개사단을 보내 제7군단을 편성했다. (반석이 어디인지 확인할 필요)
중공군이 상호방위협정 이행을 위해 개입했다. 한국전쟁 발발이전에 북한과 중국이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는 주장은 현재까지 <괴뢰군 연혁>밖에 없다.
올린이:admin2019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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