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뢰군 연혁>의 내용중 특이한 내용들을 북중관계 및 북소관계에 관한 내용이다.
일전에 언급한 것과 같이 1949년 1월 하얼빈에서 북한과 중국이 동북의용군을 북한으로 송환하기 위한 회의를 했으며 이때 소련 대표단 전원이 참석했다는 내용이 있다(12)
이 내용에 대해 추가적인 출처를 확인하고 있으나 아직 다른 출처를 찾지 못했다. 중국의 선지화가 쓴 ‘천조’라는 책에 한국전쟁에 대한 자세한 자료가 제시되어 있으나 1949년 1월의 하얼빈 회의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소련 대표단 전원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소련이 그 당시 이미 동북의용군의 복귀와 관련한 내용에 깊숙하게 개입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렇게 보면 이미 이 당시에 소련이 한반도에서의 전쟁상황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까지 자료에 따르면 스탈린은 1949년 9월 정도가 되어서야 한국전쟁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통상적인 정설이다. 그러나 <괴뢰군 연혁>은 그런 통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 있는 것이다.
특히 1949년 3월 북한과 소련의 군사비밀 협정이 맺어졌다는 것은 1949년 소련을 탈출한 칼리노프(북한주재 특별군사고문단)가 주장한 내용이다. 그는 조소 경제문화교류협정과 더불어 비밀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외교아카데미의 바자노프 교수와 러시아국제관계대학 토르쿠노프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 방안을 제기하고, 스탈린이 이에 반대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평가된바 있다.
<괴뢰군 연혁>은 조소간 군사적 협정의 내용을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어서 바자노프교수와 토르쿠노프 교수의 주장을 추가적으로 비교해 볼 필요를 느끼게 만들고 있다. 중국의 선지화 교수도 바자노프와 토르쿠노프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괴뢰군 연혁>은 조소간 군사협정과 경제문화협정을 분명하게 분리하여 다루고 있으나 그간의 연구에서는 군사협정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관련 자료는 다음과 같다. 찾아보아야 한다.
한국전쟁,문서와 자료,19501953년 (국사편찬위원회 편, 국사편찬위원회, 2006)
「한국전쟁과 소련의 역할: 1949년 3월 조소 양국 정부의 협상을 중심으로」(전현수,『대구사학』,2010)
한편, 가장 관심이 가는 문제는 북한과 중국의 방위협정이다.
모스크바에서 1949년 3월 18일에 체결되었다는 조약과 관련된 내용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선지화의 <천조>에서도 1949년 3월 18일 북한과 중공의 방위협정과 관련한 내용을 다루지 않고 있다.
<괴뢰군 연혁>는 1949년의 조중 및 조소의 군사협정을 매우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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