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저우언라이의 작전개념 제시
중국은 김일성에게 이후 작전의 방향으로 장기전을 제시했다. 9월 20일 저우언라이는 니에즈량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김일성에게 전달하게 했다.
“1) 장기전을 해야한다는 당신의 생각은 정확한 것입니다 .
2) 현재 중요한 문제는 자력으로 장기전을 수행한다는 전체적인 방침아래, 어떻게 주력부대를 보호하여 적군을 각개격파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적군이 서울을 점령한다면 인민군의 후방이 끊길 위험이 있습니다.
…
5) … 기층에서 단번에 승부를 결정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259, 주34 주은래연보(1949-76) 상권, p.80
저우언라이는 10월 1일 추가적인 전문을 보냈다.
“인민구 제1방면 군 8개 사단이 이미 고립되었는데, 8개 사단을 둘로 나누어, 4개사단은 지나치게 무거운 무기들을 파괴한 후, 수많은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적군간의 간격을 이용해 38선 이북으로 철수하고, 다른 4개 사단은 남조선에서 수많은 소규모 부대로 나눈 후, 남조선인민들을 의지해 적의 후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적의 대규모 부대를 견제하여 북진을 못하게 할 수 있는지 고려”
“당신들의 군대는 반드시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철수해야 하며, 이는 빠를 수록 좋다.”
(260, 주35 주은래연보(1949-76) 상권, p.83)
조어언라이의 전문은 패퇴하는 인민군을 위한 작전지침이었다. 김일성이 조우언라이의 제안을 어떻게 반영했는지 또는 당시 철수상황에서 소련의 고문관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아직 알기 어렵다.
군사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은 승리할 때보다 패배할 때이다. 패배할때 부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운용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런점에서 저우언라이의 작전지침은 인민군에게 가장 시급하게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북한은 대체로 저우언라이의 작전개념에 따라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2 인민군의 인천-서울 방어작전의 의미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달리 북한 인민군들을 인천상륙 작전이후 철수하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미 살펴본 <인민군 연혁>에 따르면 인민군은 주로 한반도 중동부 지역으로 주력이 철수했다. 그리고 태백산과 강원도 지역에 제2군단이 유격작전을 수행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9월 28일 서울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약 13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약 13일간의 기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후방에서 열세장비와 병력을 가진 인민군들의 저항이 매우 강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입장에 보면 인천상륙작전이후 서울까지의 전투는 가장 성공한 지연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동해안에서 한국군 3사단이 9월 30일 양양에 도착했으며 10월 1일에 38선을 돌파했다. 이를 두고 볼때, 북한 인민군들의 인천-서울 방어작전은 중동부 지역의 인민군이 철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었다고 할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전환시켰으나 이후 서울점령까지 시간이 너무 늦어서 인민군을 차단포위하는데는 실패했다. 처음부터 서울을 견제하고 곧바로 동해안쪽으로 진출했다면 인민군의 북상을 차단하고 전쟁을 조기 종결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한국군과 연합군은 작전의 중점을 서울확보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북괴군의 주력을 격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후 상황에 대한 작전적 분석이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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