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실의 책에서는 중국의 참전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분명하지 않다.
지금까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은 스스로 참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북한은 미군의 공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소련에 중국 참전여부를 물어본것
소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중국의 참전을 요청했으나 중국은 소련의 요청을 거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참전을 결정한 것
중국이 소련의 권유를 거부하다가 참전을 결정한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번 포스팅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우선적 권리를 소련이 중국에 양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저의 해석을 제시한 바 있다.
소련은 국공내전이후에도 여순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바 있다. 제정러시아의 만주 여순 대련지역에 대한 조차권을 연상시키는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의 참전은 한반도에 대한 우월적 권리를 소련으로 부터 양도받기 위한 과정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직접 중국에 참전을 요청했지만 이는 소련이 승인하지 않았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김일성은 도움을 기다리다 지쳐 직접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9월말 김일성은 동북변방군 사령관들을 만나도록 북한의 내부상 박일우를 안동으로 파견하였다”(박영실 87)
공식적인 참전 결정이전 중국의 움직임
1949년 김일성이 조선인 출신 군인들의 입북을 요구할 때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지원해주겠다는 의사를 표명
전쟁개전후 조직된 동북변방군은 참전결정직후 중국인민지원군으로 바뀌어 전투에 투입
동북변방군의 훈련과 준비완료시점을 9월말까지로 정함. 이에 대해 박영실은 중국이 8월 중순부터 이미 전쟁에 참전할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봄(박영실96)
8월 31일 저우언라이는 각부대 선임장교들과 회의를 열고 미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 때 1년간 예상되는 사상자수를 예측, 사망자 6만명, 부상자 14만명을 예측(박영실 97, 베이비스 헬버스템, 513쪽)
중국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자 마자 즉각 선발대를 파견하여 당시 전황을 살펴보았다.(박영실 88) (자선문 조용전 저, 윤영무 옮김, 중국인이 본 조선전쟁-판문점 담판, 한백사, 1991. 92쪽)
박영실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위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49(50?)년 10월 4일 북한의 직접적 도움 요청과 소련의 권고로 마오쩌둥은 중앙정치국 회의를 주제하면서 군대파병과 북한에 대한 군사적 원조문제를 토의했다.
의견은 북한에 대한 파병을 유보하자는 입장과 군대를 파병하여 적극적으로 북한을 원조하자는 입장 두가지로 나뉘어졌다.
이후 10월 5일 항미원조보가위국 결정으로 중앙군사위원회 작전부는 참전 명령을 작성
10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 중국군의 6.25 전쟁 참전을 결정
10월 11일 스탈린과 저우언라이 회담에서 소련 공군의 준비부족으로 파병할 수 없다고 하자, 12일 마오쩌둥은 가오강에게 출동중지를 명함
10월 13일 중앙정치국 긴급회의에서 소련 공군의 지원이 없더라도 참전하는 것으로 결론
션양에서 돌아온 박일우는 중국의 작전계획을 보고. 중국지원군은 대략 26만으로 북중국경선 3개방면에서 10월 15일부터 20일까지 집결지역으로 출발할 예정이며 집결지역은 박천, 희천, 강계임
10월 14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인민군과 관련된 문제는 김일성과 중국측에서 공동으로 결정해야 하며, 중국군에게 필요한 기술장비는 소련이 제공한다고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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