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34, 제4차 전역과 군사와 정치의 문제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jpg

1951년 1월 25일 리지웨이사령관은 즉각 반격을 실시했다. 펑더화이는 유엔군이 퇴각에서 반격까지의 행동이 이렇게 신속하게 전개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중공군은 계획했던 휴식과 정비를 취하지 못하고 곧바로 전투행동에 들어갔다. 중조연합군은 회의를 통해, 시급히 부대정비와 보충을 한다음에야 전투를 재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펑더화이는 부대정비를 위한 시간과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유엔3인위원회의 휴전제안을 제한적으로 수용하면서, 인민군과 지원군이 오산, 태평리, 단구리 전선에서 북쪽으로 15-30km 철수할 것이라고 밝히는 방송을 베이징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전보를 1월 27일 마오쩌뚱에게 보냈다.

그러나 마오쩌뚱은 그 다음날인 1월 28일 펑더화이의 건의를 묵살하고 휴식을 중지하고 계속해서 남진하라고 명령했다.

마오쩌뚱은 펑더화이가 요청한 부분적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지원군과 인민군이 북쪽으로 15-30km 후퇴한다는 잠정 휴전에 관한 발표는, 적들이 우리가 북쪽으로일정한 거리를 철수하면, 그들이 한강을 봉쇄한 후 군사행동을 중단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리”하다는 것이다.

“우리 군은 즉시 제4차 전역을 개시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 목적은 미군과 적군-2-3만명을 괴멸하고 대전, 안동 이북의 전선을 점령하는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인천, 한강 남쪽의 교두보 및 서울을 사수해야 하며, 동시에 적의 주력군을 수원, 이천으로 유인해야 한다. 전투가 시작되면, 인민군과 지원군은 반드시 적군이 원주에 구축한 방어선을 격파하고 영성, 안동방향으로 진격해야 한다.”

한편, 마오쩌둥은 자신의 제4차 전역에 대한 생각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의견을 물어보았다.
스탈린은 마오쩌뚱의 결정을 지지했다.

“국제적 관점에서 보면, 적들이 인천과 서울을 점령하지 못하게 하고, 중조연합군이 적의 진공부대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340, 주60,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1년 1월 28일;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보, 1951년 1월 30일, АПРФ, ф.45, оп.1, д.337, л.41-44)

모택동이 제4차 전역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실현할 수 없었다.

결국, 제3, 4차 전역에 대한 마오쩌뚱의 작전에 대한 개입은 전체적으로 실책으로 드러났다. 펑더화이가 유엔3인위원회가 제시한 휴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만일 스탈린이 중국과 미국이 서로 싸워서 힘을 소모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것은 스탈린뿐이었다.

제3차 전역이후 계속공격하라고 요구한 바실리예프 소련대사와 고문관들은 군사적인 이유에서 그런 입장을 견지한 것인지 아니면 스탈린의 전략적 구상 때문인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지속적인 추격이라는 점에서는 소련 고문관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스탈린의 전략적 구상도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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