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34 고착된 전선에서

전선은 고착되었다. 소규모 전투위주로 전쟁이 계속되었다. 어느듯 여름도 가고 가을도 저물었다. 어느 듯 단풍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1951년 10월 23일 차가운 늦가을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지 어느 듯 1년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놓았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남북 피난민의 대이동이 있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어떤 이들은 3백만명이 넘는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5백만명이 넘는다고 했다.

이대용도 그간 보직이 바뀌었다. 7월 15일 제2사단 32연대 제1대대장으로 부임해 김화 동남에 있는 파조봉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하다가 사단 정보참모 대리로 자리를 옮겼다. 정보참모 대리로 1개월 반 정도 근무하다가 10월 20일 다시 제32연대로 돌아가 제3대대장이 되었다. 한계급 진급을 해서 소령이 되었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선과 달리 후방은 아수라장이었다. 부모잃은 전쟁고아들이 거지가 되던가 불량배가 되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생활수단을 잃는 전쟁미망인들과 유부녀들 중 일부는 어린 자식들의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 밤거리를 헤메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악질 관리들은 여전히 양민의 고혈을 빨고 있었으며 사회악 조성의 첨병과 같은 짓을 했다.

전선에서는 점차 힘의 균형이 변하하고 있었다. 중공군과 한국군의 상대적 전투력이 변화하고 있었다. 1년전에 무적을 자랑하던 중공군의 전투력은 1년후인 지금에 와서는 현저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제공권을 완전하게 장악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보급물자와 인원수송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으며, 중공군의 사기도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반면, 전투경험이 부족하고 기초 훈련도 미비했던 한국군은 1년동안 중공군과 전투를 하면서 전술을 배웠고 병사들의 전투기술도 놀랄만큼 발전해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제9군단의 지휘를 받는 한국군 제2사단과 미제 24사단은 10월 22일 금성, 수리봉 일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한국군 정면이 적은 용이하게 격파되었으나, 미 제24사단은 공격하던 월봉산은 지형이 공자에게 불리하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0월 24일 이대용의 제32연대 3대대가 미군 지역을 넘어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대용의 제3대대가 이실골을 지나 월봉산 밑에 다다르자 미군은 부상병과 전사자들을 후송하고 있었다. 아직 인생의 반도 채 살지 못한 20대의 금발 청년들이 옷이 피투성이가 된채 숨을 거두고 누워 있었다. 이대용은 지나가면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 마음속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했다.

이대용의 제3대대는 신속하게 중공군을 격파하여 24시간 후에는 금성 서방 백양리 부근에 진출하여 경계병을 금강산으로 가는 철도에 연하여 배치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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