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2월 소련군사 대표단의 입북으로 북한군은 정규군으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1949년 1월 하얼빈에서 ‘동북의용군’ 입북에 관한 회합이 있었다.
북측 대표는 민족보위상 최용건, 포병사령관 김무정, 북로당 중앙위원장 박우용, 독립제4사단(166사단)장 방호산, 목단강 군구 독립 3사단 수송 여단장 박경덕 아얼빈 보안여단 정치위원 주덕해 등 6명
중공 대표는 동북인민 해방군 사령관(이후 제4야전군 사령관) 임표, 동북인민해방 야전종대사령관 란혁, 동북인민해방군 김림지구사령관 주보중, 동북정치위원회 주석 임품, 중국국 공산당 동북국 정치위원 이입삼 5명과
소련군사 대표단 전원이 참가함
동회합에서 동북인민해방군애 한국인 부대를 2949년 9월말까지 3회에 걸쳐 28,000명을 북한으로 송환시키자는 것을 합의
이미 1947년 3월 길림성 정부내에 ‘민족청’이라는 연락기관을 설치하고 ‘임춘추’외 5명을 파견하여 중공축과 교섭을 취함
1947년 7월에는 의용군중 열성분자 60명을 선발하여 북한내 각 대학에 입교시킴
1947년 10월에는 전투경험이 있는자 약 1,500명을 선발하여 민족보위성 및 북한 내무성에 각각 배치하였으며, 이들이 북한군의 골격이 됨
이를 볼때 1948년 1월 하얼빈 회담에 의해 ‘동북의용군’입북이 결정되었으나 이보다 앞선 1947년 9월부터 ‘동북의용군’입북이 이루어지고 있었음
본격적인 입북은 1949년 7월 중순 제166사단이 입북하여 10월 초순까지 12,000-16,000 명이 신의주 안주지구에 입북완료
제164사단은 1949년 8월 23일 약 10,000명이 회령을 경유 라남에 도착
기타 의용군 약 2,000-3,000명이 동년 8월을 전후하여 입북
이와 별도로 스탈린그라드 에서 독소전에 참가했던 소련군 출신 약 5,000명이 1949년 초에 입북함
1949년에 입북한 총병력은 35,000-36,000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이후 소련제 무기로 완전무장했다.
1949년 3월 초순 조소군사협정을 체결하면서 무기를 반입했다. 소련은 이 비밀협정에 의거하여 북한군에 장비와 훈련을 원조했다.
1949년 3월 18일 북한대표와 중공대표가 모스크바에서 소련 주최하에 조중방위협정을 체결, 중공은 북한군 증강 및 교육에 직접 간접으로 원조하고 만일의 경우 구나행동까지도 취할 것을 약속함
1949년 8월 중순경 T-34 전차 다수를 소련으로 부터 반입하여 전차연대를 전차여단으로 증편
YAK-9형과 IL-10형 등의 소련제 항공기 다수를 반입하여 비행연대를 ‘용강’에서 평양으로 이동하여 비행여단으로 증편
1949년 8월 평양 고사포 연대를 창설. 내무성 경비대 강화를 위해 38 경비여단을 재편하고 철도 경비여단을 신설하여 평양에 경비대대와 경위연대 각종 병과학교를 설치
해군도 소련군의 원조로 대소형 30척의 소련제 함정을 보유
이와함께 ‘조국 보위 후원회’를 조직하여 만 17세 이상 만 40세까지의 남녀를 동원하여 군사훈련을 실시
재편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스탈린그라드에 참전했던 한인 5000여명이 북한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스탈린그라드에서 들어온 한인부대에 대한 기록은 별로 보지 못했다.
또한 1949년 조중 방위협정을 체결했다고 하는데 그 때 유사시 군사행동을 취하기로 했다는 내용에 대한 확인을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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