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기 전투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 당시의 내용이다. 이때 당시 50년 12월 31일 시작된 공세이다. 중공군 참전이후 대부분의 전투는 중공군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제3차 공세에서는 인민군의 역할도 상당했다. 특히 유격전을 수행하던 제2군단은 제3차 공세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51년 1.1 00:30 38선 일대에서 전투준비를 완료한 적 24만명은
주력을 동두천-의정부로 지향
조공을 개성-문산-선금-화천-춘천-인제-현리선으로 두고 공격
괴뢰군 1군단은 개성방면으로 임진강을 도하 강행하여 주공인 중부지역의 중공군을 지원
제1군단은 1.4일 서울에 침입
1월 6일 09시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 38군, 39군, 40군 42군 50군은 한강을 도하, 1월 16일 수원선에 진출
중공군과 합동작전을 수행한 괴뢰군 제1군단(8사단, 47사단, 17사단)은 1월 8일 47사단을 인천, 17사단을 서울에 남기로 8사단만 중공군과 합동으로 수원방면으로 남하
괴뢰군 제5군단(6,7,12,38,43,27사단 3여단)과 중공군 3야전군 11병단 37군은 1월 3-4일간 괴뢰군 제2군단의 견제공격을 이용하여 춘천을 점령. 이때 한국군은 3사단, 5사단, 8사단)
이후 홍천, 횡성을 거처 1월 7일 북한군 제6사단 12사단 27사단 주력이 원주를 점령
괴뢰군 제2군단 2사단 4사단 9사단 10사단 27사단 14연대 31사단, 맹산방면에서 조직된 남조선 유격대 총사령부 소속의 유격대 제1,2,3,5,7여단과 중공군 2병단이 오대산 방면으로 침투 남하
북한군 유격대는 현리방면으로 남하-발왕산-정선-영월방면으로 남하한 제2군단 9사단과 함께 영월을 1월 13일에 점령 일부는 일월산 방면으로 진출
한국군 제1군단 정면에는 북한인민유격대 김원팔부대와 3군단 소속 15사단 2연대 3대대로 이들은 1월 20일 강릉을 점령
북한군 제2군단 일부는 계속 남침했으나 평창, 영월, 남대리 일대에서 손실을 입고 제10사단만 와룡산, 청송, 의성을 통과하여 보현산까지 남하
1.7일 원주를 점령한 북한 제5군단은 모두 심각한 손실을 입고 최초 7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던 군단이 3개사단으로 해체 재편되어 춘천-홍천에서 병력 수습
1.1일 00:30 38선 공격과 동시에 유격대 길주 8부대 제1,3,5,7 유격여단, 제1,2 병단은 인제, 고대산, 발왕산, 영월, 명산 지구로 침투했으나 모두 격멸당함.
그중 제1병단이 충청도 지역 침입에 성공했고 문경, 괴산 일대에서 병력을 재수습 남부군단으로 개칭함
제3차 공세이후 인민군과 중공군은 수원, 양녕, 원주, 평창, 영월 선에서 방선을 구축
김일성은 최고사령관 명령 제7호(51.1.5)를 발령하여 서울해방의 승리를 기념하여 1월 3일 20시에 평양과 서울에서 240문의 대포로 각각 24발의 축포 발사를 명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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