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하는 문제로 시끄러웠다. 학문적인 논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일부 북한의 주장을 무조건 따르는 학자들의 주장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문제의 발단은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자였다. 부르스 커밍스가 쓴 책이다. 그는 한국전쟁당시 미국이 확보한 노획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을 내전이라고 성격규명했다. 그러나 그가 본 자료는 매우 일부에 불과했다.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출하자 소련은 중요한 자료는 모두 소련으로 옮겼고 옮기지 못한 자료는 모두 소각했다. 소각하지 않은 자료가 남았다. 주료 지방인민위원회의 자료들이다.
부르스 커밍스가 본 자료는 그렇게 미국이 노획한 자료였다. 중앙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없었다. 그래서 지방인민위원회에서 발생한 일들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의 성격을 내전이라고 규정했다. 한국전쟁을 내전이라고 규정하면서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부르스 커밍스 자신은 분명하게 남침이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의 소위 진보적 성향의 학자들은 남침이 아니라고 우겼다.
남침과 북침에 관한 논쟁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우스운 것은 소련의 한국전쟁에 대한 기록의 서문에 이미 한국전쟁은 남침이라고 규정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1950년대 중반에 비공개 토의를 통해서 작성되었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은 2002년이다. 아마도 서문은 본문을 작성하고 나서 쓰여진 듯 하다. 아무리 늦게 잡아도 이 책이 출판된 2002년 이전에 소련의 입장을 남침이라고 정리되었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얼마나 게으른가를 알 수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변국에서 나오은 한국전쟁에 관한 책들을 번역하거나 공부를 했더라면 그런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다음은 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의 서문에 있는 남침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내용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에도 수백 건에 달하는 다양한 수준의 무력충돌은 있었으나 북한이 그와 같이 대규모적인 반응을 보인 적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서울이 도발하였다고 해도 평양의 반응이 부적절했으며 ‘반격’이나 ‘보복’을 훨씬 넘어섰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행동을 실행하기 위해선 면밀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충분한 병력의 축적과 장비 및 연료 그리고 식량 등 필요한 예비물품에 대한 지원이 요구된다,”
“전술이론에 따르면 전과를 거두기 위해서 공격 측이 적보다 수적으로 몇배 더 우세해야 한다. 북한으로 출정하기 위해 면밀히 준비한 남한이 예상치 못한 총공격을 실시하고는 북한 지역으로 불과 몇 킬로미터 밖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이 몇시간 만에 한국군은 인민군에 의해 격멸되어 3일후에는 인민군 연대들이 도착하고 수도 서울을 잃었다”
“스탈린은 극동의 군사정치 상황을 평가하면서 한반도에서 내전을 일으켜 군사적인 방법으로 남북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이 미국의 대규모 군사지원을 받은 장개석 군대를 격멸한 1949년 중국혁명의 확실한 성공을 바탕으로 스탈린은 한반도에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 분명하다.”
“북한의 당원 강상호는 자신의 진술을 통해 인민군이 먼저 군사행동을 개시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는 전투 첫날에 38도선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목격자였다. 전투지역의 상황을 분석한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김일성이 전쟁을 개시했다는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장님이거나 바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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