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뢰군 연혁)27, 제7기 전투(평양점령시까지)

제7기 전투는 평양점령시 까지이다.

북한군은 금천, 철원, 금화, 양구, 인제 양양 선에서 한국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북한군은 이후 원산, 평강, 철원, 시변리, 금천 지구에 재집결하여 방어를 시도함

10월 10일 한국군 1군단이 원산을 점령, 유엔군이 사리원을 점령함

북한군은 신편 혹은 재편안 제31사단, 32사단, 제35사단, 제105사단 제 25여단, 제26여단, 제70연대, 제351연대, 제300부대, 제78연대, 제94연대, 제587연대, 제112연대 제7,8,13사단 등 무려 20개의 분산된 부대가 이천-순안, 율리 를 경유 평양방향으로 퇴각

한국군은 10월 19일 17시 평양을 점령

북한군 평양 방위사령관 ‘최인’ 중장은 약 20,000명의 신병을 받아 평양방위에 임했으나 10월 18일 수천의 병력만 남겨두고 철언, 평강, 사리원 방면에서 북상한 병력과 합류 청천강 이북으로 출수

북한군 제2사단은 자강도, 제13사단은 강계, 제1사단 강계, 제15사단 강계, 제4사단 영원, 제5사단 강계, 제10사단 영천, 제6사단 희천 방면으로 후퇴

8사단은 풍기로부터 춘천-고산 경유 초산향에 철수

평강 철원 이천 화천을 중심으로 후퇴 시간을 얻지 못한 제6,7,9,10 사단의 일부병력 1만명은 전선 사령관 “김책” 중장 지휘하에 신편하여 제2군단을 조직하여 유격전을 시도

(춘천에서 화천으로 공격하는 한국군은 제6사단이었다. 그중 제7연대 제1대대 김용배 중령이 지휘하는 부대가 선두에서 전투했다. 여기에서 제1중대장으로 복무하던 이대용 대위(육사7기)는 화천시내를 공격하면서 정복을 입은 다수의 북한군 군관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상급 사령부로 추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당시 화천에 전선군 사령부나 제2군단사령부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국군 제1군단은 원산에서 계속 공격 10월 18일 함흥을 점령

한국군 제6사단은 양덕 방면으로 분산 북상하는 북한군 제15, 12 사단을 계속 추격

북한군은 평양방면에서 순천, 이천 방면으로 북상한 것이 약 4만명, 함흥지구로 북상한 것이 약 1만 7천명, 잔적 약 2만명 정도였다.

(낙동강에 약 10만정도의 병력이었으니 당시까지 약 2만명 이상이 손실을 보았다는 의미이다.)

패부하는 제1,2 집단군 소속 패잔병을 모마 양덕에서 제3군단을 편성하고 그 이후 성천-덕천-연반을 경유, 원촌리로 후퇴

1950년 10월 11일 강계 대동면에서 패잔병을 규합 제5군단을 창설

50년 10월 전선사령부 및 방어사령부와 혼합편성하여 연합사령부로 개칭

50년 10월 숙천 지구에서 제19사단 패잔병으로 제46사단을 창설하고 만주 연길로 퇴각

김일성은 1950년 10월 11일 방송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북한주민의 단결을 호소

그러나 10월 19일 한국군이 평양에 입성하자 모두 도주

(북한군이 패주하는 과정에서도 재편성을 위한 노력을 매우 적극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7만 명이상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작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전력을 유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재편의 노력이 이후 중공군과의 관계에서 김일성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근거가 아니었나 하는 느낌이 든다)

(북한군이 패주하는 과정에서의 재편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과정에 대한 보다 세밀한 연구는 필요할 듯 하다)

올린이:admin2019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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