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 Kathryn Weathersby

전번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이 항복하기 전날, 스탈린은 포츠담에서 동맹국들이 합의한 협정을 변경한, 한국에 두개의 점령구역을 만들자는 미국의 갑작스런 제안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8 월 말, 적군(소련군)이 획득하기로 예정된 영토였던 만주 항구와 쿠릴 열도 (Kurile Islands)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자마자, 소련 외무부는 한국으로 관심을 돌렸다. 9월 11일 한국에 대한 정치적 해결을 논의하기 위해 런던에서 열린 외무장관 회담에서 소련 대표단은 미국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구상에 어떻게 하면 최선의 접근을 할 수 있는가를 논의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소련 외교부가 준비한 브리핑 보고서는 스탈린이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요구했던 한 가지 조건, 즉 한반도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다는 것을 소련 대표부가 요구하는 것을 지시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들은 소련군은 미군이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 한 한국에 주둔할 것이며, 2년 정도 될 것이라고 특정했다. 그 이후 점령군이 철수하고 4개국 신탁통치를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소련 외무부 브리핑 페이퍼는 신탁통치의 목표가 “한국민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회복 그리고 독립을 향한 한국인들의 진보적 발전의 촉진을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하는 미국의 이상적인 구상을 반복했다. 한편, 소비에트 대표단에 대한 지시는 1930년 후반부터 소련의 외교정책을 이끌어 왔던 영향력 전략의 범위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소련 외무부는 신탁통치에 대한 미국의 구상을 승전국이 한국과 일본에서 원하는 영토를 통제할 수 있는 메카니즘으로 보았다.
모스크바의 우선 과제는 블라디보스톡의 해군 기지와 여순항의 만주 해군기지간의 항로에 대한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련 대표단은 한국의 부산 및 인천항 뿐만 아니라 제주도에 대한 배타적인 통제권의 확보를 요구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미국이 이러한 양보에 동의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소련 외교관들은 미국이 “태평양에서 전략적 지역을 얻기를 바랄 수 있다”고 언급했으며, 이는 미국이 해군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태평양의 여러 소규모 도서를 해군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장악하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를 고려한 것이었다. 만일 미국이 모스크바의 요구를 거부하면, 소련 외교관들은 한국의 세 지역에 대한 소-중 공동 통제를 제안 하고자 했다. 소련은 포츠담 회담에서 중국과의 별도 회담을 통해 양국이 러시아가 건설한 만주철도와 항구에 대한 공동통제에 합의했던 전례가 있었다.
둘째, 소련 외무부는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일본의 도서를 한국에 병합함으로써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련 대표단은 쓰시마가 한국으로 넘겨져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쓰시마가 일본이 대륙국가 특히 한국에 대한 공격적인 행동의 기반으로의 역할을 했다”는 근거에 바탕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미국인들이 이것을 거부했을 때, 소련은, 미국이 일본에서 점령했던 태평양의 도서, Bonin, Volkanos, Marianas, Carolinas 및 Marshall Islands에 대한 국제 신탁 통치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소련 대표단은 미국이 부산, 인천, 제주도에 대한 요구에 동의 동의하면 상기한 제안에서 물러설 수 있다고 제시했다.
결국, 소련 대표단은 런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에 대한 자신들의 제안을 제기하지 않았다. 다음 포스팅에서 우리는 외무장관 회담에서 왜 한국 문제에 대한 토의가 지연되었으며 어떻게 이런 환경이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켰는지를 알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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