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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년 7 월 포츠담 회의에서 소련 지상군이 한반도의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책임을 지는 것에 대해 미국과 러시아의 군사지도부간에 쉽게 합의하자, 트루먼 대통령의 정무 보좌진들은 그런 행동의 함의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적군(소련군)이 폴란드에서 독일 군대를 격퇴 한 후 러시아는 친 모스크바 정부를 설치했으며, 이는 해방된 유럽에 자유선거를 보장하겠다는 동맹국들의 합의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자신들의 중요한 완충 지대로 보았다는 점에서 폴란드는 한국과 비슷했다. 그 위치로 인해, 폴란드가 독일에서 소련으로 이르는 침략의 경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일본이 아시아 대륙으로 침략하기 위한 육교였다. 그래서 미국 외교관들은 소련의 한국 점령이 “동양에 이식 된 폴란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제 우리는 왜 미국이 소련이 한국에 친 모스크바 정부를 세우려고 하는 것에 우려하는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 미국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결코 반대한 적이 없었으며, 전시 협상 중에도 한반도에 대한 통제권을 얻는 데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관심은 1945년 늦은 여름에 이르러 소련과의 전시 협력이 영국과 미국과 전쟁이전의 관계를 규정하던 이데올로기적 적대감과 지정 학적 경쟁의 복귀로 대체 될 것이 분명해진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련이 군사적으로 훨씬 강력해졌다. 더욱이, 동유럽에서 적군(소련군)의 행동은 소련이 다가오는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 자신들이 통제하는 국경의 영토를 크게 확대시키고자 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전략 기획자들은 다가오는 소련과의 갈등을 보면서, 군대가 소련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려했다. 그들은 대규모 전쟁을 위한 가용한 능력을 확인했다. 제 2 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미국, 영국, 소련, 독일, 일본 등 5 개국 만이 존재할 것이었다. 패배한 과거의 적국은 전쟁으로 심하게 손상을 입었고, 그들의 군대는 전후 점령 기간 동안 그들의 군대가 해산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전쟁 능력은 그대로 유지되고 회복될수도 있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독일과 일본이 소련측에 합류 할 것인지였다. 영국과 미국이 소련과 전쟁은 가까스로 가능할 수도 있었으나, 만일 모스크바가 독일과 일본의 지원을 획득한다면 소련을 패배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전후 세계에 대한 관점에서 볼 때, 소련이 통제하는 한반도의 가능성은 중요했으며 이는 일본이 모스크바의 통제하에 놓일 가능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적군(소련군)이 한국을 장악한다면, 이는 일본 공산당을 고무할 것이며 결국 일본인들로 하여금 소련이 조만간 일본을 점령할 것이라는 파국적인 생각으로 이끌어 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한반도의 소련군 진출은 소련 군이 일본 남부까지 쉽게 공격 할 수있을 것이었다.
소련이 일본을 장악하지 못하게 방지하는 것이 극동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가 일본이 항복 할 것이라는 일본의 약속 워싱턴이 접수하자마자, 미국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은 지상 작전을 위해 한국을 소련의 지역에 놓기로 한 포츠담의 합의를 즉시 재검토했다. 소련군은 이미 북쪽으로 이동했지만, 미국은 그들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방지하고 싶었다.
따라서 국무부-전쟁성-해군성 조정위원회는 8 월 10 일 밤 늦게 펜타곤에서 만나 일본군의 항복을 규정하는 제 1 일반 규정 초안을 작성하면서, 그들은 미군이 한반도의 일부를 차지한다는 조항을 포함하기로 결정했다. 딘 러스크 (Dean Rusk) 대령과 찰스 본스틸(Charles Bonesteel) 대령은 미군이 한반도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걸릴 것 인가를 고려하는 가운데 미국의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제안을 만들기 위해 지도실로 갔다. 그들은 38도선으로 나뉘어진 두개의 지역을 제안했으며, 여기에 모스크바가 새로운 계획을 거부할 경우 미군이 도달할 수 있는 지역보다 북쪽에 있는 서울을 미국의 지역에 두었다. 국부부-전쟁성-해군성 조정위원회는 이 제안을 수락했으며 이를 일반명령 1호에 포함시켜 스탈린의 승인을 위해 즉각 모스크바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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