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더스비 교수 씀

이번 포스팅은 제2차 미소공동위가 열리기 전의 미국측이 어떤 상황에 직면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상황을 매우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한국문제의 해결은 전쟁성, 즉 미육군의 가장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미국은 남한 점령 정책을 위해 하루 100만달정도의 예산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시급하게 정부수립을 요구하고 있었고 미국은 국제적인 해결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국제적 해결을 생각했던 미국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요구했던 이승만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은 상황에 끌려 다니는 처지에 직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남한의 정치세력을 지원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점령정책은 점령지역과의 원활한 협조가 필수적이었는데 미국은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상황을 악화시킨 이유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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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월에 들어서서 한국의 미국대표부는 새로운 딜렘마에 봉착했다. 미국은 국가수립이후 평시에는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으며, 미군은 세계대전이 끝나자 신속하게 동원해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확대된 새로운 책임을 짊어졌으므로, 남한 점령을 계속하기 위한 인원과 물자가 충분하지 않았다. 하루에 백만달러가 소요되었으며 전쟁성은 트루만 대통령에게 한국에서의 활동을 계속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전쟁성 장관 패터슨은 국무부에 의회에 더 많은 자금을 요구하거나 미국이 한국에서 철수하거나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토쿄의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 대한 소련과의 교착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워싱턴에 제안했다. 그는 미국이 이문제를 유엔으로 넘길 것을 제안했으며, 유엔은 결국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는 이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위원히를 제안했으며, 이 위원회는 일본의 패망이후 한국이 독립한다고 한 1943년의 카이로 선언에서 동맹국이 한 약속을 어떻게 수행할 것 인가에 대한 계획을 고안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모스크바 3상합의를 구체화하기 위한 4 국 협의회와 한국의 통일과 독립을 방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위급 미-소 협의회를 요구했다. 맥아더는 계속되는 교착은 한국국민과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신과 영향력에 나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쟁성 분석관들은 맥아더의 제안은 성급하다고 판단했으며 또한 남한지역의 즉각적인 독립이라는 대안도 거부했다. 국무부는 맥아더의 생각은 소련과의 협력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비현실적이라고 언급했다. 대신 국무부는 점령정책을 계속하기 위해 5천만 달러를 요구한 펜타곤의 제안에 동의했다.
1월 29일 국무부 전쟁성 해군성 조정위원회(SWNCC)의 회의에서 페터슨 전쟁성 장관은 한국문제를 “전쟁성이 지금 봉착한 유일한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묘사했다. 행정부는 남한의 경제적 정치적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국회에 새로운 적절한 방안을 요구하기로 합의했다. 조정위원회(SWNCC)는 한국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특별 부서간 위원회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승만이 하지 장군을 한국의 독립 지연에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던 1947년 초부터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미국은 모스크바와 협력하겠다는 희망을 포기해야 하며 대신 남한에서의 임시정부를 위한 별도의 선거를 치룰것을 주장했다. 남한에 수립된 과도 입법회의의 보수주의자들은 신탁통치를 비난하고 언론의 자유에 대한 원칙에 대해 소련과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는 결의안을 전년도에 통과시킨 바 있었다.
이런 모든 어려움에 직면하여 실망한 하지 장군은 맥아더에게 “한국은 동방의 정말로 뜨거운 지점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적극적이고 협조적인 국제적인 행동이 즉각적으로 취해지지 않으면, 야만의 수준을 넘는 전면적인 내전이 발생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적으로 재개되거나 앞으로 두달안에 전국적인 수준에서 한국의 상황에 에서 적극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한국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할 기회를 상실하거나 한국민의 신뢰를 상실할 것이다라는 것이 본인의 의견이다”라고 보고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2월에 개최된 특별 부처간 위원회의 제안을 살펴보고 한국의 상황에 대한 워싱턴과 서울의 미국 관리들이 느낀 점증하는 위기감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참고자료]
This post relies on James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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