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포스팅은 한반도 분단을 미국과 소련이 결정했다고 하는 포츠담 회담에서는 한반도 분단과 관련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웨더스비 교수는 이러한 내용을 방대한 양의 문서고 자료를 통해 검증을 했고 지금 여기에서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학문의 출발점이 아닌가 합니다.
포스트 #2
한국의 분단, 1945 - 1948
Dr. Kathryn Weathersby
1945 년 2월 얄타의 스탈린 휴양지에서 소련, 미국 그리고 영국 동맹국이 전후 처리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회동을 하기 전, 미국과 영국은 소련이 어떤 대일본전 참전 댓가를 요구하려 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스탈린은 다소 온당하게 러시아가 1904 ~ 05 년 러일 전쟁에서 패한 이후 일본에게 뺏긴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그의 목표라고 주장했다. 이는 사할린 남부 섬, 적어도 홋카이도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쿠릴 섬의 최북단 그리고 러시아가 1890 년에 만주에 건설 한 철도 및 항구의 환수를 의미했다. 소련 지도자는, 일본으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 혹은 그런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완충지로서의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대한 어떠한 요구도하지 않았다.
역사적 기록은 이 점에 대해 명확하지 않지만, 역사적인 선례를 보았을때 스탈린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04 년 전쟁 이전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보다는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러시아는 진해 해군 기지 임대와 광업 할양을 통해 귀중한 광물 자원을 확보 함으로써 한국 영토의 유용한 부분에 접근해 왔다. 더욱이 러시아는 고종의 내각이 어떤 경쟁국가도 완벽한 통제력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여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 유지하려는 짜르정부를 돕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므로,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신탁통치에 관한 아이디어를 설명했을 때, 소련 지도자는 그러한 계획이 러시아의 1905 년 이전 전략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스탈린은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신탁통치가 얼마나 오래동안 지속될 것인지와 미국이 한국에 군대를 배치 할 것인지 여부를 물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논의가 사적인 양자회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공식적인 회의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이는, 전후에 미국이 해방될 영국의 영토를 대영제국의 지배하에 되돌려 주지 않고 신탁통치를 하려고 한다고 의도하고 있다고 경계하여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이런 개념에 격렬하게 반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군 지도자들은 다음달 7 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만났다. 독일이 5 월에 항복했기 때문에 유럽의 많은 영토 문제가 해결되어야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에게는 소련의 대일본 전쟁 참여 계획이 특히 중요했다. 얄타 (Yalta)에서 스탈린은 독일을 패배시킨 후 3 개월안에 동쪽에서 전쟁에 돌입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따라서 다음 달부터 침공이 시작될 것이었으며, 미국과 소련 군대는 협력 조건을 타결했다.
소련 총참모장 알렉세이 안토노프 (Alleksei Antonov)는 포츠담에서 대독일전에서 소련이 수행 한 것처럼 미국도 대 일본전에서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고 추켜 세우면서 토론을 시작했다. 안토노프 (Antonov)는 적군(소련군)이 진격할 동안, 미국이 한국 해안에 상륙할 작전을 계획했는지 정중히 물었다. 미국 참모총장은 실제로 그러한 가능성을 논의했지만 미군이 일본 본토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 한 이후에야 한국에 상륙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미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샬 (George C. Marshall)은 안토노프 (Antonov)에게 미국은 자신들의 선박이 일본의 자살 공격에 노출 될 수 있기 때문에 상륙작전을 수행 할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규슈에 예정된 상륙을 위해 이용 가능한 모든 공격용 선박이 필요했다. 전쟁이 여러 달 더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마샬 장군은 규슈에 대한 통제를 확보안 시점, 미군항공기가 일본의 최남단 비행장에서 한반도를 엄호할 수 있는 시점에 한국에 대한 공격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적군(소련군)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미 공군과 해군이 한국에서의 연료공급 및 통신라인을 파괴하고 일본의 항공기와 해군 함정을 파괴 할 것이라고 동의했다.
왜 한국이 나뉘어 졌는지에 관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련과 미국이 포츠담 회의에서 그런 합의를 했다고 확고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운명의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일본 군대를 물리 치는 데 군대가 책임을 진다는 것이 유일한 합의였다는 것이다. 소련과 미군의 지도자들은 적군(소련군) 지상군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 미 공군과 해군이 지원할 것을 어려움없이 결정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포츠담에서의 만남 직후 전쟁이 예기치 않게 빨리 끝났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정치적 우려가 어떻게 워싱턴의 최전방으로 이동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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