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전사 18-1 제5차 전역, 전역직전의 당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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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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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3월 하순 4차전역당시 유엔군이 38선 넘느냐 아니냐의 문제, 한국전쟁 마무리의 방식 등에 관해 미국, 영국 프랑스의 논쟁이 있었음

영국 프랑스 등은 한국전쟁에 장시간 말려들어 서구의 역량이 약화되고 유럽의 안정에 영향이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이때가 전쟁을 마무리지을 수 있는 시기라고 여기고 38선에서 사실상의 휴전을 공개적으로 주장

중국과 회담을 요구

미국은 의견이 양분

미국의 전략은 반드시 유럽 제1, 아시아 제2여야 하며 시간을 오래 허비하는 한국전쟁은 미국의 세계전략에 영향을 줄 것이므로 한국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한 후 중국과 휴전협상을 주장

강력한 군사작전으로 승리하고 통일된 한국을 건립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 중국으로까지 전쟁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

3월 24일 맥아더의 성명

“만약 유엔군이 전쟁을 한반도내에 국한시키려는 지금까지의 정책을 바꾸어, 우리의 군사행동을 중국 연해와 내륙으로 확대한다면 중국 공산당은 즉각, 그리고 확실히 군사적 붕괴의 위험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트루먼의 맥아더에 대한 대응과 정책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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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성명을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에 대한 도전”, “유엔 정책에 대한 멸시”라고 하면서 4월 11일 맥아더의 직위를 해제

매튜 리찌웨이를 미국 극동군 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

제임스 벤플리트를 리찌웨이 후임으로 제8군사령관으로 임명

전쟁의 범위를 확대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천천히 한국북부로 밀고 들어가 유리한 지역을 점령한 후에, 즉 실력정책을 기초로해서, 우리측과 외교협상을 진행하거나 또는 군사행동을 계속하여 아이사에서 미국의 지위를 유지하기로 결정

유엔군은 트루먼 정책에 따라 4월초 38선을 넘고 측후방 상륙을 실시하여 정면공격과 배합하면서 전선을 39도선 및 그 북쪽 지역으로 밀고 들어가 한반도의 허리부분(원산-평양)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계획을 수립

평양-원산 선의 의미

정면이 협소(170km)하고 공격과 수비에 용이하며,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 확보 가능

유엔군의 군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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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을 전후하여 서쪽 한강하구 - 임진강 - 38선 - 양양에 이르는 선까지 진격

공군은 북한 후방, 교통로, 물자적재소, 군대집결지역에 맹폭을 가함

해군도 원산 신포 등 모든 항구에 포격을 강화

동해 연해안 도서에 대한 정찰과 습격활동을 배가

4월 중순 미국 국민방위군 제40, 45사단이 본토에서 일본으로 파병
보병 제34연대와 합쳐 제16군단을 조직, 한반도 투입 준비

유엔군은 중국군 전략예비대의 집결을 발견하고 4월 하순 혹은 5월초에 중국군이 공격할 것으로 예측

제9군단 제1군단의 일부만 철원, 금화, 금성지역에서 공세를 유지하고 타 정면에서는 잠시 방어태세로 전환
중국군 전역반경에 대처할 준비

당시 유엔군의 지상작전부대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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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군단 17개사단, 3개여단, 1개연대로 총 34만명

제1선병력이 12개사단 2개여단

제2선 및 후방에 5개사단과 1개여단 1개연대를 보유, 춘천, 현리, 수원, 원주, 강릉, 대전지역에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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