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게 주목을 하지 않았지만 중공군의 작전수행에 있어서 마오쩌둥의 작전지도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듯 하다.
제2차 전역이 끝나고 이어서 곧바로 제3차 전역을 수행토록한 것은 마오쩌둥의 지시였다.
팽더화이는 마오쩌둥의 제3차 전역수행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팽더화이는 38선을 넘어서 진격하라는 지시를 마지못해 따랐으며 38선 확보여부는 작전의 실제 상황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서울점령은 중국인민 지원군이 아니라 북한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Tsui David,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가(7), 개입결정의 실현, 1950년 10월-1951년 7월(1), 전략연구, 통권 제46호, 243쪽)
팽더화이가 마오쩌둥의 지침에 반대한 것은 전투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없지만 공격을 받아 저지를 받아거나 전투의 승리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었다(션즈화 최만원 역, 332-333)
팽더화이의 생각을 반영하듯 1951년 1월 3일 마오쩌둥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적은 남쪽으로 물러서고 있고, 1951년 1월 3일 포로로 겨우 3,000명을 잡았을 뿐이다. 이제 서울, 인천, 수원, 이천, 양평가 홍천을 점령한 후, 우리 군은 진격을 멈출 것이며, 정비와 휴식, 보충 그리고 개편을 할 것이라”(심지화편, 조선전쟁, 아국당안관적해밀문건, 대북, 1992, 653-654)
펑더화의 작전중지 결정에 대해 북한과 소련은 반대했다. 김일성은 38선을 넘은 이상 신속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도 계속적인 전투를 주장했으며, 소련의 자하로프는 중조 연합군대의 진격 중단에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이기고 있는 군대가 적군추격을 중단하는 경우가 어디있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박영실 122)
의문 1
마오쩌둥이 제3차 전역을 즉각 실시하라고 하는 지시는 작전적으로 타당한 지시였다. 유엔군이 채 정비하기 전에 가급적 빨리 타격을 가하는 것은 전술적으로 옳은 결정이다. 팽더화이는 왜 마오쩌둥의 지시를 탐탁치 않게 여겼을까? 준비가 미흡하더라도 승기를 잡았을때는 과감하게 진출해야한다는 것은 장수의 기본이다.
의문 2
팽더화이가 제3차 전역을 중지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부대가 지쳤거나 작전을 더 이상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중공군의 피해상황도 그리 크지 않았다(피해상황 확인)
의문 3
북한과 소련의 항의를 받고 마오쩌둥은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항의를 받고 취한 조치는 팽더화이의 조치를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인민군 1,2,3,5군단은 모두 한강이남에 제1선을 구축하고, 지원군은 인천 및 한강이북으로 철수해 2-3개월간 휴식을 취하며, 인천과 서울은 지원군이 경비를 맡는다. 인민군은 현재 동북지역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신병으로 보충하고, 만약 김일성이 휴식과 보충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계속해서 진군할 수 있으며, 인민군이 진격해서 적을 공격할 때는 북한 정부가 직접 지휘하고, 지원군은 인천, 서울 및 제38선 이북의 방어를 담당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션즈화, 최만원 역, 395-397)
마오쩌둥의 말은 싸우고 싶으면 북한군 단독으로 싸워라는 것이었다. 준비가 되지 않았던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제3차 전역에서 중공군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한 것이 중공군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던 중요한 요인이라고 보인다.
만일 팽더화이가 중공군이 개입하더라도 한반도 전체를 석권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면 그의 평가는 옳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마오쩌둥은 한반도 전체 석권을 목적으로 참전했다.
제4차 전역은 애초계획했던 2달의 정비기간을 채 보내기도 전에 약 1달만에 재개했다. 1951년 1월 28일 마오쩌둥은 즉시 제4차 전역을 수행하여 2-3만명의 미군과 한국군을 섬멸하여 전투선을 대전, 안동지구 이남으로 설정하라고 지시했다. 마오쩌둥의 이런 지시는 제4차 전역성공이후 남한과 미국이 중국과 북한에 정전협상을 시도할 것이라는 전망에 기반한 것이었다. (박영실 123)
박영실은 이런 평가를 중국측 자료를 인용했으나 그 내용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중공군의 제3차 전역에 이어 제4차 전역으로 연결된 과정을 보면 중국군의 유엔군에 대한 평가가 정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제3차 전역 중지한 이후 얼마 되지 않은 1951년 1월 15일 부터 리지웨이 사령관은 공세적 탐색작전 ‘울프 하운드’를 시작해서 중공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과정에서 제3차 전역에 대한 작전지도의 적절성 제3차 전역의 중지에 대한 결정의 적절성에 대한 검토와 분석 평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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