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은 한국전쟁 발발을 모두 4단계로 구성하고 있다.
제1단계는 한국전쟁발발로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14일이다. 약 두달반의 기간을 다시 4단계로 구분했다.
제1단계는 서울에서 적의 격멸, 한강 및 강릉계선 진출(6.28-7.2)
제2단계는 인민군의 보성, 금산, 영동, 영주, 영덕 계선으로의 진출과 공격확대(7.3-25)
제3단계는 인민군의 부산방향으로의 공격(7.26-8.20)
제4단계는 부산교두보 전투(8.21-9.14)이다.
이제까지 제1단계의 주요내용을 정리했다. 이번부터는 제2단계의 내용이다. 주로 사단급 부대의 이동을 정리했기 때문에 정리하기 어렵다. 그중에서 특징적인 것을 몇가지 집어 보려 한다.
우선 이시기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금산-영주 방어선의 중앙 방향에 집중되었으며 이는 사전에 미리 고려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사전에 채택된 결정에 따라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제1선에 위치한 9개 사단중에 7개 사단이 활동하던 금산-영주 방어선의 중앙방향에 집중되었다. (p.65)”
이와함께 측방에서 활동하던 부대들이 성공을 했다는 점을 특별하게 밝히고있다.
“주력의 측방에서 공격하던 부대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6보병사단은 제603모터찌클연대와 함께 목포와 순천근교로 진출한 다음 한반도 남서쪽 전역을 해방시켰고, 영덕을 점령한 제5보병사단은 포항으로부터 40km의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장비가 불충분하여 이 방향에서 전과를 확대하기 어려웠다. (p.65)”
여기서 인민군은 작전의 속도를 높이면서 제1집단군은 영동지역에서 김천, 대구 방향으로 공격하고, 제2집단군은 예천과 영주지역에서 안동, 영천 방향으로 계속 공격했다.
한편, 측방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제6사단과 제5사단이 성공를 거두었으나 이 전과를 확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제6보병사단은 제603 모터찌클 연대와 함께 일부 병력으로 목표항과 한반도 남해안을 방어하도록 하고, 주력으로 남원에서 순천 북쪽 진주방향으로 공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p.66)”
“제5보병사단은 방어로 임시(탄약이 공급될 때까지) 전환되어야 했다.(p.66)”
“적의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고 있을 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요부대의 공격을 가속화하는 것이고 이 방향에 새로운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광범위한 지역을 석권했던 제6보병사단이나 제5보병사단의 지대로 병력을 재편하는 것은 시간낭비로 이어질 수 있었고 또한 지형적 조건과 적의 공군력 때문에 어려웠다(p.67)
이 기록을 보면 소련도 제6사단과 제5사단의 전과를 적시에 확대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제5사단이 탄약부족으로 공격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다. 당시 제5사단을 상대하던 국군 3사단과의 상호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편 제6사단은 노력을 집중하는데 실패했다. 목포와 순천으로 제6사단 예하부대를 보냄으로써 남원을 거쳐 순천 북쪽으로 진출하는 부대의 전력이 약화되었다.
이렇게 보면 남원에서 순천 북쪽으로 지향한 제6사단의 진출을 처음으로 저지한 여수 순천 학도의용군의 저지작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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