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11, 인민군의 서울공격, 홍천춘천의 지연

서울진출

서울에 들어온 인민군들의 움직임에 대한 기술은 다음과 같다.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북쪽에서 서울로 들어왔고 제3사단은 우회해서 남쪽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아마도 마포나 신촌쪽에서 용산쪽으로 진출한 듯하다.

“6월 28일 4시 30분에 제3보병사단제 제105전차여단은 적을 공격하였다. 1시간이 지난후에 제4보병사단도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6월 28일 5시 30분경 제105전차여단의 선두부대가 서울로 진입하였고, 6시에 여단의 주력은 라디오방송국, 전력발전소, 우체국, 전신국 그리고 기타 관공서를 점령하였다. 제105 전차여단 예하 연대들과 거의 동시에 서울에 진입한 제4보병사단 예하 연대들은 16시까지 서울의 북부와 중심부를 점령하였다. 제3보병사단은 같은 시간에 남쪽에서 서울을 우회하여 도시의 남쪽을 점령하였다. 적은 전투장비와 군장을 버리고 서둘러 한강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서울로 진출한 북한의 사단급 및 연대 지휘관들이 신속히 한강을 도하하지 않고 적시에 적을 추격하지 않아 적은 한강다리를 폭파할 수 있었고, 제3, 제5보병사단 예하 연대들을 이동시켜 한강 남안에 자신의 방어선을 강화하였다.(p.50)”

한편, 소련은 제3, 제5보병사단 예하연대들이 방어에 동원된 것으로 잘못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한강선 방어는 제대로된 건제부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군은 거의 모든 사단 건제가 붕괴되었있었다. 김홍일 장군이 거의 혼자서 여기저기서 흘러드는 패잔병들을 모아 방어선을 구축했다.

홍천 춘천지역의 공격지연

춘천과 홍천에서의 진출지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2보병사단은 어려운 지형조건에서 포병을 잘 활용하지 못하였고 적의 완강한 저항을 극복하면서 느리게 전진하였다. 제2 보병사단은 6월 30일 전에 한강으로 진출하여 도하한 다음 7월 2일에 광주를 점령하였다(p.51)”

“제12보병사단은 어론리, 홍천, 횡성 방향으로 진격하여 7월 2일에는 원주를 점령하였다.”

“제2, 12보병사단의 공격이 처음부터 느리게 전개된 이유와 관련해서는 그 인접부대(연대들)와의 간격이 점점 넓어지면서 인민군사령부가 그 간격이 발생한 지역으로 제15보병사단을 보냈고, 6월 30일에 이포리와 홍호리 지역에서 한강으로 진출하였고 한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공간지역에 제15사단을 투입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나온다.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공격지연은 부대간의 간격때문이 아니었다. 만일 제15사단을 공간지역에 투입했다면 북한군 제2군단의 예비투입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부분은 라주바예프 보고서나 여타 다른 자료와 비교를 해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제12사단도 결국 한강을 도하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제2사단과 제12사단 모두 서울쪽으로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Posted using Partiko iOS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11, 인민군의 서울공격, 홍천춘천의 지연’

Your browser is out-of-date!

Update your browser to view this website correctly. Update my browser n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