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중국은 북한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그런 틈을 김일성을 놓치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의 지원을 위해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1957년 3월 4일 조선노동당 평양 시위원회 조직부장이던 김충식이 중공중앙과 소공중앙에 자료를 제출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고 싶다고 요청했다. 3월 16일 지린성 위원회 서기 푸찐셩은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김충식이 조용하게 있을 것을 요구했다.
김충식 이외에도 당시 지린성에서 피난 생활하던 연안파 출신은 중국으로 부터 북한과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439)
8월 종파 사건을 즈음해서 무상원조 5,000만 위안을 제공해달라는 북한의 요구를 무시했던 중국은 1957년 9월에 접어 들면서 태도를 바꾸었다. 김일이 이끄는 조선노동당경제대표단이 제1차 5개년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 이때 중국은 매우 세심한 준비를 했다. (440, 주217, 조선노동당중앙경제대표단의 중국방문활동에 관한 문건, 1957년 8월 24일부터 9월 19일, 중국외교부당안관, 117-00665-03, pp. 5-25)
김일성은 중국의 태도가 바뀌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57년 11월 모스크바 회의기간에 마오쩌뚱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김일성은 조선이 법률적으로 독립적 지위임을 강조하면서 조선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가 8월 종파사건의 본질이라는 점에 대해 동의를 얻었다.
마오쩌뚱의 동의를 얻은 김일성은 귀국후 즉각 행동을 개시해 한층 강화된 정치적 숙청을 감행했다. 김두봉은 이번 상황에서 피하지 못했다. 당적이 박탈된후 구금되었다가 순안에 있는 농장에서 노동교화를 당했다.
연안파뿐만 아니라 김원봉, 조소앙 등도 숙청당했다.(441, 주219) 1958년 초까지 조선은 반국가 반당종파분자들을 전면적으로 적발하여 분쇄했으며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김승화, 서휘, 이필규 등 반당종파분자들의 잔여세력을 숙청했다.(441)
이런 숙청과 함께 북한은 중국과 관계강화를 강조했다. 이 시기 북한이 중국을 국제무대의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으며 국제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칭송한 것은 중국을 이용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의 일환이었다. 중국은 그간 적대적이었던 8월 반당종파사건에 대한 입장을 완전히 바꾸었다.
마오쩌뚱은 1956년 중국과 소련이 대표를 파견해 조선 내부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옳지 못한 방식이었다고 자인했다. 조우언라이도 1958년 2월 북한을 방문한 후 ‘조선에서 망명한 사람들의 견해는 매우 편향된 것이며, 중국이 조선을 오해하게 만들었다’(441, 주221, 조우언라이와 랴오닝성 간부 회담기록, 1958년 2월 21일, 지린성 당안관, 1-14/1-1958.94, pp. 10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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