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3일 북한은 정식으로 중국외교부에 통보해, 4명의 조선공민이 안동지역에서 조선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중국변방수비대에 체포되었으며, 이들의 송환을 요청했다. 조선주재 중국대사 챠오샤오광은 현장에서 즉시 ‘이들은 통상적으로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반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챠오샤오광이 본국의 훈령을 받지 않고 즉각적으로 대응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측면을 해석가능하게 만든다. 이미 챠오샤오광이 그런 상황에 대해 충분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8월 반당종파사건에서 중국정부의 개입가능성을 더욱 확실하게 추론하게 하는 것이다.
중국에 비해 소련은 당시 입장이 분명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챠오사오광은 이바노프에게 상기한 문제를 통보하고 소련의 생각을 들어보려고 했으나 이바노프는 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433, 주 198, ЦХСД, ф. 5, оп. 28, д. 410, лл. 322-325)
9월 5일 주소북한대사 이상조는 페도렌코를 통해 자신의 편지를 후르시쵸프에게 보냈다. 이상조는 김일성이 의견이 다른 동지를 탄압한다고 지적하고, 소공중앙의 개입을 요구했다. 북한 외무성이 두번이나 귀국하라고 명령했지만 투병중이라고 하고 아직 귀국하지 않았다고 했다. (페도렌코와 이상조 회담요약, 1956년 9월 5일,ЦХСД, ф. 5, оп. 28, д. 412, лл. 224-228, 소련에서 요양중이던 우정상도 체포가 두려워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오쩌뚱과 미코얀의 회담기록 1956년 9월 18일)
9월 6일 소공중앙주석단은 회의를 개최하고 북한문제를 토론했으며, 소공중앙연락부장 포노마레프에게 이상조를 접견토록 하공, 중공 제8차 당대회에 참석하는 소공 대표에게 중공중앙과 의견을 교환하고 싶다고 중국대사에게 연락했다.(434, 주434. РГАНИ, ф. 3, оп. 12, д. 1005, л.30, Фуренко А.А.(гл.ред) Презиум ЦК КПСС 1954-1964, Том. 1, Черновые протокольные записи заседаний с тенограммы, Москва, РОССПЭН, 2003, сс. 166-167)
소련의 기본입장은 중국과 협의는 하겠지만 조선노동당 내부일에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포노마레프는 소공이 조선노동당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해다랄는 이상조의 제안을 거절했다(434, 주 201,ЦХСД, ф. 5, оп. 28, д. 410, лл. 228-232)
소련의 조선노동당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션즈화는 당시 후르시쵸프의 비밀보고서가 소련국내와 전체사회주의 진영의 반발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중공중앙은 4월 5일 공개적으로 스탈린 개인숭배에 관한 문제를 비난함을써 소련공산당이 신중하도록 태도를 변화시켰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납득하기 어렵다. 만일 중국이 개인숭배 비판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면 연안파들의 김일성 개인숭배비판을 무마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션즈화는 소공중앙의 6월 20일 결의를 소련공산당이 개인숭배에 대해 완화된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소공중앙의 6월 20일 결의가 무슨 내용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소련은 그 이후에도 개인숭배에 대해 완화된 태도를 지녔다고 하기 어렵다. 그렇게 보면 션즈화의 해석은 일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소련이 북한에서 중국의 세력확대를 견제하기 위한 태도로 보는 해석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8월 종파사건은 북한과 소련의 합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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