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6년 8월 30-31일 조선노동당은 중앙전회를 개최했다. 김일성은 상무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보고서였다.
연안파 간부이자 무역상인 윤공흠이 발언대에 나섰다. 그는 비판적인 어조로 당내에 존재하는 잘못된 경향을 비판했다. 그의 발언은 여러차례 정지당했고, 일단의 고함속에 파묻히기도 했다. 최용건은 일어나 욕설을 퍼부었고 회의장은 혼란에 빠졌다.
최창익은 윤공흠을 변호하기 위해 발언하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후 휴회시간에 윤공흠과 노동조합주석 서휘, 문화부부상 김강, 건재국상 이필규는 조용이 회의장을 떠나 중국으로 잠입했다.
최창익은 반당집단의 수괴이자 이론가로 몰렸다. 그 다음날 회의에서 반당호라동에 종사한 윤공흠, 서휘, 이필규와 김강등 4인의 당적을 박탈하고, 최창익은 중앙상위원직에서 경질되었다. 이들에 관한 문제는 당중앙특별위원회에서 심사하기로 결의했다.
박창옥은 동해안 소형 공장의 공장장으로 좌천되었고, 최창익은 돼지사육장으로 보내졌다.
회의 종료후 국가전체가 대규모의 체포와 강력한 탄압의 소용돌이에 빠졌으며, 당과 국가 지도자들에 불만을 품은 극소수 반동분자들이 획책한 궁중반란식의 심각한 음모사건으로 공개되었다.
9월 1일 김일성는 소련대사관에, 최용건은 중국대사관에 전체회의의 상황과 통과된 결의안을 통보했다.
(433, 주 197, ЦХСД, ф. 5, оп. 28, д. 410, лл. 319-321, 322-325, 327-332 ; ЦХСД, ф. 5, оп. 28, д. 412, лл. 392-303)
션즈화는 8월 종파사건에 대해 소련이 책임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사실은 중국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보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전쟁 종전이후 북한은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다. 중국은 스탈린 사후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한국전쟁 이전에 스탈린과 마오쩌뚱간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국이 지도적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었다. 스탈린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중국이 마음대로 하기 어려웠지만, 스탈린 사후에는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당시 북중관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노동신문 살펴볼 필요)
가설로 세울 수 있는 것은 8월종파사건은 중국이 뒤에서 연안파를 조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특히 소련대사가 반당종파사건의 조짐을 미리 알려주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북한주재 소련대사는 당연히 그런 움직임을 알려줄때 본국의 지침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소련도 점점 강력해지는 연안파를 제거하기 위해 정보를 김일성에게 알려주었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관련 자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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