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년)는 역사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고대 인물 중 하나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지금까지 남아있는 엄청난 규모의 저작 때문이다. 실제, 키케로는 고대 로마인 누구보다 많은 저작을 남겼다.
키케로는 정치가이자, 웅변가였고, 또 철학자이기도 했다. 줄리어스 시저, 술라 그리고 폼페이 같은 야심찬 남성의 시대였던 로마 공화정 시절, 보잘것없는 배경으로 자수성가해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밝힌 인문학의 실용적인 유용성은 수 세기에 걸쳐 인문학을 발전시키는데 토대가 되었다. 키케로가 사용하고 대중화시킨 ‘인문학(humanities)’이란 용어는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 ‘인간 본성’, ‘문명’, ‘친절’)’에서 파생된 말이다.
또한 키케로는 어쩌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가사이자, 페트라르카 이전까지 가장 위대한 인문주의자였을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미미하다.”- 키케로
하잘것없는 배경으로 자수성가한 키케로는 경력을 갖춰나가기 위해 자기 계발에 크게 힘썼다. 광범위한 독서로 로마와 그리스 작가들의 저작을 두루 섭렵했다. 그리고 이윽고 소위 자유 3과목( trivium; 문법, 논리학, 수사학)에 통달하게 된다.
그는 논리적 추론 능력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현실주의자였다. 사람들이 이성적인 주장으로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감정에 이끌린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글에서 나타난 수사학에 대한 생각은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여 논쟁에서 이겼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법률가로서 다양한 사건을 공개 변론했다(고대 로마에서 재판은 대중들에게 일종의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 말했습니다. 그는 섹스투스 로스티우스(Sextus Roscius)를 변론한 사건과 가이우스 베레스(Gaius Verres)를 공격한 사건에서 웅변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
키케로는 연설 도중에서 눈에 띄는 소품을 사용하고, 큰 손 짓을 하는가 하면(많은 청중의 관심을 장시간 유지하기 위해 웅변가에게 필요한 필 수 덕목임), 인신공격과 공포 조성 같은 언사도 서슴지 않으면서 청중의 감정에 호소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그의 방식이 일반적인 군중 심리에 기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엄청난 독서광이었던 키케로는 스토아학파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선동가가 아니었다. 단지 추상적인 원칙보다는 인간 본성에 기반한 관점으로 수사학을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다. 키케로는 웅변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더 많은 사람의 이익에 관심이 있었다. 실제, 줄리어스 시저의 암살 사건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사건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같은 인물들을 상대로 로마 공화국을 지켜내려다 세상을 떠났다.
시세로는 평생 동안 많은 저작을 통해 연설의 복잡함을 붙들고 씨름했다. 그는 잘 쓰인 원고를 가지고 하는 연설보다 형편없는 원고를 통한 연설이 훨씬 더 전달력이 좋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웅변가론(De oratore)”(BC 55년)에서 이렇게 썼다.
말 많은 어리석음보다 무언의 효용을 떠 좋아한다.
키케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정적인 반응에 훨씬 더 익숙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성과 논리를 사용해 자기 생각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스토아학파는 실용적인 철학이다. 개인의 모든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곤란한 상황을 헤쳐나가는데 이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정한 스토아 철학이라면, 삶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요소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면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개선해 나가는데 주력할 것이다. 키케로같이 수련이 잘 된 사람들은 그러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다.
키케로의 정치 성향은 개인의 책임과 법률을 중요시하는 보수주의자였고, 복잡한 웅변술에 대한 이해에서 잘 드러나 있다. 웅변술의 궁극적인 가치는 주권자 개인이 사회를 강화시켜 더 큰 선(정의)에 초점을 맞추는 한편, 그러기 위해서 기본적인 욕망(감정)에 호소하는 수단으로서다.
“불의는 종종 교묘한 속임수를 통해 발생하기도 한다. 즉, 법을 지나치게 미묘하게, 심지어 일부로 허위로 해석하는 데서 불의가 발생한다. “법은 더 많아지는데도, 정의는 더 줄어들고 있다.”라는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 키케로의 법률론(De officiis)(BC 44년) 중
자료 출처: Kevin Shau, “Cicero and the Art of Rhetor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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