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콥 리틀 이야기의 마지막을 잊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좀 흐른 점을 감안해 이전 1, 2부에 합쳐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
제이콥 리틀(Jacob Little)은 월스트리트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투기자 중 하나였다. 1835년 뉴욕 증권 거래소 최초로 주식 매점(買占)에 성공했다. 그로 인해 월스트리트의 “큰 곰(Ursa Major)”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이콥 리틀>
다른 공매도 세력들처럼, 그 또한 매수 세력들의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주식 투자로 미국에서 가장 부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오늘날에 와서 리틀이라는 이름은 거의 잊혔지만, 그의 타고난 투기 기술은 제이 굴드, 다니엘 드류, 제시 리버모어 등 그의 선례를 따르는 많은 이들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제이콥 리틀은 1794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812년 전쟁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대부호이자 유명인이었다. 제이콥 리틀은 아버지 덕분으로 뉴욕을 주름잡던 상인 중 하나였던 제이콥 바커(Jacob Barker)의 회사에 취직했다.
1822년 리틀은 민간 은행에서 발행한 금은 등으로 제조된 정화(正貨) 거래 중개 업체를 세웠다. 이를 통해 “정직하고, 활기차며, 훌륭한 중개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후 1834년 월스트리트의 구 거래소 건물에 증권 회사를 차렸고, 이후 25년 동안 제이콥 리틀 & 컴퍼니(Jacob Little & Co.)란 이름으로 월스트리트를 지배했다.
주식 시장을 변화시킨 철도
#
1834년 리틀이 주식 시장에 들어섰을 당시, 시장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 1830년대까지는 상장 주식 대부분이 보험 회사와 은행 주식이었다. 대부분의 금융 회사들은 소규모였고, 발행 주식 수도 적었으며, 거래도 빈번하지 않았다. 따라서 투기도 제한적이었다.
1820년대와 1830년대, 철도 건설에 많은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식 시장에 철도 주식 상장이 붐이 일었다. 1828년 철도 회사 볼티모어 앤드 오하이오 철도(Baltimore and Ohio Railroad)가 상장되었다. 1825년까지는 뉴욕 증권 거래소에 상장된 철도 주식이 없었지만, 1840년대가 되자, 거래소 거래량의 거의 90%를 차지하게 되었다. 주식 수와 거래량이 커지면서, 리틀 같은 투기 세력들이 시장에 뛰어 들었고, 1830년대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회가 생겼다.
리틀은 시장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종종 사무실에서 주식 투기에 12시간을 보냈고, 나머지 밤 6시간은 민간 기업에 발행한 정화를 매매하면서 보냈다. 리틀은 시장 양쪽 모두에서 활동했는데, 고평가되었다고 판단되는 주식은 공매도했고, 공매도되고 있던 주식은 매점하려 했으며, 상승장에서는 매수 후 보유를 택했다. 리틀은 자신이 했던 모든 거래를 기억할 수 있었고, 모든 상세한 거래 내용을 직접 챙겼다. 심지어 자기가 매도한 주식을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거래에 실수가 없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제이콥 리틀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투기 세력은 내부 정보를 통해 이익을 불렸지만, 리틀은 미래의 주가 방향을 예측하고, 주가를 움직여 이익을 거두는 방법을 사용했다. 리틀은 속부터 도박꾼이었지만, 스스로 유리한 카드가 들어게 만들기도 했다. 제이콥 리틀의 정신은 이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내가 시장에 남아 있을 수만 있다면, 시장에 무슨 일이 일어나던 상관없다.”
리틀이 주식 시장에서 했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830년대 주식 시장이 오늘날의 시장과 어떻게 다른지 이해해야 한다. 물론, CNBC나 티커 테이프, 전신이나 전화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거래는 거래소 객장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처럼 하루 종일 주식이 거래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전장과 오후장으로 나뉘었다. 각 장 중에는 거래소 대표가 상장된 각 주식의 거래를 관장했다. 트레이더는 주식의 이름이 불릴 경우에만 매매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거래소 대표가 이리 철도 주식 객장에 도착해, 고정된 가격에 이리 주식의 매매를 통보하면, 트레이더들은 그 가격에 주식을 팔거나 사는 식이었다. 그러면 거래소 대표는 다음 주식으로 이동해 매매를 진행했다.
주식의 연속 거래도 존재하지 않았다. 매일 한 주식을 거래할 기회는 단 두 차례였다. 그게 전부였다. 모든 거래 각각이 기록되어, 다음날 뉴욕 타임스, 뉴욕 헤럴드 또는 다른 신문에 공시되었다. 1850년대 이후 뉴욕 타임스 사본을 찾아보면, 증권 거래소에서 일어난 모든 거래 기록을 볼 수 있다.
공매도는 주식 소유자로부터 직접 빌려 매도하거나, 보다 빈번하게는 주식 옵션 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1830년대의 주식 옵션은 고정된 프리미엄으로 컴퓨터를 통해 블랙-숄스 수학 공식을 계산해 가격이 정해지는 파생상품이 아니었다.
그 대신, 누군가가 고객들에게 특정 가격에 주식을 매수 또는 매도할 기회를 제공하고, 매수인에게 향후 6개월 동안 요청하는 시점에 주식을 전달하는 시스템이었다. 뉴욕 타임스에 게시된 거래 기록을 보면, 옵션 매수인이 해당 주식을 매수 또는 매도할 수 있는 기간과 합의 가격이 표시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증권 거래소에서 외환 거래도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도시들 간에 돈이 이동했으며, 거래소 객장에 있던 이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보였다.
리틀 앤 모리스: 첫 번째 주식 매점
#
리틀의 첫 번째 쿠데타는 1835년 모리스 운하 & 뱅킹 컴퍼니(Morris Canal and Banking Company) 주식의 매점을 통해서였다. 1792년 윌리엄 듀어(William Duer)와 알렉산더 매콤(Alexander Macomb)이 퍼스트 뱅크 오브 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 주식 매점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 시장 붕괴를 촉발시킨 바 있었다.
모리스 운하는 1822년 완공된 107마일 길이의 운하였으며, 뉴저지 북부를 관통하면서, 델라웨어 강이 있는 필립스버그를 거쳐, 허드슨강이 있는 저지시티까지 이어졌다. 이 운하를 통해 펜실베이니아의 석탄을 뉴저지로, 다시 뉴저지의 철광석을 펜실베이니아로 실어 나를 수 있게 되었고, 운송 비용은 낮아졌다. 운하의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물품을 옮기는 데 불과 4일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철도가 건설되어 같은 거리를 5시간 만에 도달할 수 있게 되자, 운하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어졌다.
당시 기업을 인수하기 위해서는, 유통 주식 전부를 매수해야 했다. 리틀은 모리스 운하를 인수하려는 목적으로 이 회사 주식을 매점했다. 그 과정에 공매도 세력이 끼어들었다. 이윽고 리틀과 손을 맞춘 뉴저지의 트레이더들이 모리스 운하의 유통 주식 전부를 사들이게 되었고, 공매도 세력은 숏 포지션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리틀로부터 주식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모리스 운하의 주가는 1834년 2월 20달러에서 1835년 1월 185달러로 상승했다. 리틀은 코너에 몰린 공매도 세력에게 더 높은 주가를 요구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한다면, 공매도 세력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다른 기업들의 주식을 팔아야만 할 것이고, 이는 다시 시장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주식 매점으로 인한 주가 상승은 아래 차트에서 볼 수 있다.
<모리스 운하 & 뱅킹 컴퍼니의 주가>
리틀은 1835년 9월 할렘 철도(Harlem Railroad) 주식 매점으로 쿠데타를 이어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할렘 주식 60,000주가 공매도된 상태였고, 남은 유통 주식은 단 7,000주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리틀은 할렘 주식을 1835년 3월 40달러에서 1835 년 9월 195달러까지 끌어올렸다.
물론, 공매도 세력은 숏 포지션을 커버해 엄청난 손실을 감당하기 싫었기 때문에, 거래소 이사회에 달려가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사회는 거부했고, 숏 포지션 청산 주가를 160달러로 정했다. 이 결정은 거래소의 향후 주식 매점 사건의 선례가 되었고, 공매도 세력은 주식 매점에 걸리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아래 차트에서 이번 주식 매점의 영향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할렘 철도의 주가>
제이콥 리틀에게는 이 두 차례의 주식 매점을 통해 “나폴레옹의 이사”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리틀은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이 뱅크 오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Bank of the United States) 주식에 작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그로 인해 1837년 시장이 붕괴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리틀은 시장 전체에 대해 매도 포지션을 쌓았고, 시장 하락으로 수익을 올렸다. 이를 통해 “월스트리트의 큰 곰”이라는 또 하나의 별명이 생겼다. 한 계산에 의하면, 리틀의 재산은 3천만 달러에 달했고, 미국 내 최고 부자 중 하나였다고 한다.
실패한 주식 매점
#
제이콥 리틀은 1846년 노리치 앤 우스터 철도(Norwich and Worcester Railroad) 주식 매점 작전에 참여했다. 그는 이 철도 회사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보스턴의 작전 세력과 힘을 합했다. 각자가 25,000달러를 담보로 걸고, 90달러 이하로는 주식을 팔지 않기로 맹세했다.
주가는 상승하기 시작했지만, 리틀은 이번 주식 매점 작전을 실패할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25,000달러의 담보를 포기하고, 손실을 줄이기 위해 80달러대에서 보유 주식을 처분했다. 리틀은 1847년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 사뮤엘 모스(Samuel Morse)가 전신 회사에 투자할 의향을 물었지만, 거절한 것인데, 그는 후일 그 결정을 후회했다.
<노리치 앤 우스터 철도의 주가>
리틀에게도 주식 매점 작전에 걸려 고통을 겪은 사건이 한차례 있었다. 리틀은 이리 철도(Erie Railroad Co.) 주식을 조금씩 정기적으로 공매도하고 있었다. 1855년 스스로를 “행복한 가족(Happy Family)”이라고 부른 경쟁 세력 조직이 리틀을 잡기 위해 덫을 놓았다.
그들은 리틀이 이리 철도 주식을 공매도하는 모습을 놔두고 지켜보면서, 자기들은 주식을 매수하고 있었다. 리틀이 궁지에 몰렸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 “가족”은 리틀에게 기한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공매도한 주식을 갚아 달라고 요청했다.
기한을 정하지 않은 이유는 리틀의 실수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리틀이 이리 주식으로 1백만 달러 이상 손실을 보고 있다고 추정했으며, 이제 그가 대가를 치를 때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행복한 가족은 뉴욕 증권 거래소 객장을 방문했고, 넬슨 로빈슨(Nelson Robinson)은 이리 주식을, 주당 62달러, 이어 63달러, 64달러 그리고 65달러에 사겠다고 말했다.
매수 호가가 점점 높아진다는 것은 팔려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로빈슨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이리 주식의 유동성이 말라버린 사실을 깨달았다. 행복한 가족은 리틀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이콥 리틀은 가까운 곳에 서서 조용히 주식을 팔겠다고 제안했다.
1855년 당시, 주식이 중개인을 통해 증서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사무실에서 공식적으로 교부되어야 했다. 결전의 날이 임박했음을 안 로빈슨과 거래소의 거의 모든 이들이 다음날 제이콥 리틀이 주식을 전달하지 못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이리 철도 사무실로 달려갔다.
리틀은 사무실 문이 닫히기 몇 분 전 나타났다. 로빈슨은 그에게 “음, 우리가 이리 주식을 가방에 가득 채워 놓았네. 전부를 말이야. 자 이제 남자답게 패배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다 끝났음을 인정하게.”라고 말했다.
로빈슨과 그의 세력이 몰랐던 사실은, 리틀이 런던에서 이리 철도의 전환 사채를 매수해 당일 아침 보통주로 전환했다는 것이었다. 리틀은 자신에게 요구된 주식 전부를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매도할 주식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작전으로 리틀이 청산한 금액은 10만 달러가 조금 넘었다. 이후 이리 철도 주가는 아래 차트에 나타난 것처럼 10달러대까지 하락했다.
<이리 철도 주가>
제이콥 리틀의 미스터리
#
25년 월스트리트 생활 동안, 제이콥 리틀은 여러 차례 큰돈을 벌었지만, 3차례 파산을 겪기도 했다. 공매도에 주력하긴 했지만, 공매로 할 만한 주식을 찾을 수 없을 때는 미국 국채와 철도 회사 채권에 투자하기도 했다.
1850년대 제이콥 리틀 & 컴퍼니는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큰 증권회사였다. 여기에 공헌한 것은 제이콥 리틀의 공매도 만이 아니었다. 제이콥 리틀은 철도 주식을 투기적으로 거래하기도 했지만, 철도 주식을 대규모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도 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제이콥 리틀에 대한 정보 대부분이 기록이 아니라 관련자들의 회상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투자자로서 그의 본모습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사실에 대한 많은 정보가 사실을 확인했을 때 잘못된 추억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실제 주식 시장 데이터를 보면 제이콥 리틀에 대한 일부 일화는 잘못된 것이다. 아래 사례는 그의 일화와 실제가 얼마나 다른지 잘 보여준다.
이리 철도 일화와 관련해, 어떤 사람은 1855년 11월 12일의 일이었다고 말하지만, 당시 이리 철도의 주가는 주식 매점 벌어졌을 때 60달러 수준에서 이미 하락해 있었다. 1838년의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이리 철도가 주식을 발행하기 전이었다. 데이터를 보면 모리스 운하와 할렘 철도의 주식 매점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리 철도 일화에서는 그 규모와 시기가 모호하다.
또한 제이콥 리틀이 공매도했던 이리 철도 주식 100,000주를 되갚은 후, 1856년 12월 5일 2백만 달러 수익 중이던 포지션이 1천만 달러 손실로 바뀌어 파산 신청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이 맞는다면 주식 100,000주 상환에 1천2백만 달러가 소요됐다는 뜻인데, 그러려면 이리 철도 주가가 120달러가 돼야 한다. 하지만 당시 이리 철도 주가는 고작 15달러에 불과했다. 또한 1856년 이코노미스트 기사에 따르면, 제이콥 리틀이 약 1천만 달러 상당의 이리, 뉴욕 센트럴 및 리딩 주식 공매도로 약 1백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고 한다. 당시 이코노미스트의 기사가 더 믿음이 간다.
1856년 12월 6일 자 뉴욕 타임스 기사에서는, 12월 5일 거래소 개장 시 제이콥 리틀 & 컴퍼니의 파산 발표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기사는 리틀이 이전 6 또는 9거래일 동안 거래소에 상장된 유통 주식 중 3분의 2를 공매도했다고 전한다. 즉, 뉴욕 증권 거래소 전체에 대해 약세적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가 공매도한 주식에는 이리 철도 만이 아니라, 리딩 및 뉴욕 센트럴도 언급되어 있다. 1856년 12월 5일 이리 철도의 종가는 62달러였다. 이듬해 2월까지 60달러를 상회했지만, 이후 하락세를 보이면서 1856년 10월 8달러까지 추락했다.
제이콥 리틀은 분명 공매도를 했지만, 시점 선택이 틀렸고, 너무 큰 도박을 했다. 몇 개월 더 기다렸거나, 베팅 규모를 줄였다면, 1857년 시장 붕괴로 또 한 번 큰 수익을 올렸을 수도 있었다. 리틀에게 채무 상환 의무는 없었지만, 채권자들에게 1백만 달러를 배분한 한편, 모든 채권자에게 이자도 전부 지급했다.
1857년 10월 13일 시장이 붕괴되자, 은행들은 정화 지급을 중단했고, 20곳의 증권 회사 파산하거나, 거래가 정지되었다. 제이콥 리틀 & 컴퍼니 또한 거래 정지를 당한 곳 중 하나였다. 제이콥 리틀은 은행들의 정화 지급 중단 당시의 모습을 “1857년 10월 13일 2시 30분 월스트리트”라고 묘사했다. 3일 후 제이콥 리틀 & 컴퍼니의 거래가 재개되었다. 한 신문은 이를 “제이콥 없이는 증권 거래소가 제 기능을 못했다.”라고 표현했다. .
1859년 5월 13일 자 뉴욕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뉴욕 증권 거래소가 제이콥 리틀의 거래를 정지시켰던 이유는, 비록 1856년 당시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증거금을 충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리틀은 매수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데, 델라웨어와 허드슨 철도, 일리노이 센트럴 철도와 파나마 철도의 주식과 채권뿐 아니라, 미주리 주, 테네시 주, 버지니아 주를 비롯한 6개 주의 지방채를 신용 매수하고 있었다.
이들 주식과 채권 가격이 하락하자, 리틀은 부족한 증거금을 채울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리틀은 자신의 전반적인 재정 상태 안에서 당일 평균 주가를 바탕으로 증거금을 채우겠다고 약속했다. 리틀은 분명 증거금 전부를 납부했고, “제이콥 리틀의 증서가 다른 어떤 트레이더의 수표보다 더 나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제이콥 리틀의 말년
#
제이콥 리틀이 1857년 시장 붕괴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무일푼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람도 있다. 정말 그랬을까? 머천트 매거진에 따르면, 리틀은 1857년 시장 붕괴 때문이 아니라, 남북 전쟁의 결과 때문에 상당한 재산을 잃었다. 비록 재산은 줄었지만, 리틀은 1860년대에도 거래를 계속했다. 아래 사진처럼, 1864년 8월 26일 주식 25주를 모건 앤드 컴퍼니에 양도한다는 서류에 남은 제이콥 리틀의 서명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제이콥 리틀의 서명이 들어간 주식 양도 증명서>
제이콥 리틀이 무일푼으로 잊힌 인물이었다면, 머천트 매거진 1865년 6월 호에서 제이콥 리틀이 1865년 5월 28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머리기사로 전할 이유는 없었다. 머천트 매거진의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그의 사망 소식은 이 위대한 도시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지난 오랫동안 그는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를 기리기 위해 많은 트레이더들이 모였다. 그에게 존경을 받치는 조서가 작성되었고,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증권 거래소 이사회도 휴회했다.
제이콥 리틀은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베팅과 반대로 주식 시장이 움직여 모든 것을 잃게 될 때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다른 트레이더들이 자금을 날리고,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할 때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선선히 돈을 벌려주었다.
반전에 직면하고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다른 상인이 재산을 잃어 도움을 청하러 갔을 때, 그는 결코 그들을 거절하지 않고 자유롭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는 빌려준 돈을 돌려 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거래소로부터 거래 정지를 당했을 당시에도, 빌려준 돈이 몇 십만 달러에 달했었다.
제이콥 리틀은 최초의 주식 시장 재벌로서, 최초로 주식 매점에 나섰고, 최초로 일생 동안에 걸쳐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가, 또 수백만 달러를 잃기를 반복한 인물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동료 트레이더들의 회상에 의존한 이유도 크다. 모리스 운하, 할렘 철도, 이리 철도 등과 관련된 그의 일화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월스트리트에서 25년 중 나머지 기간은 무얼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남아있다.
리틀이 1850년대 월스트리트 최대 증권 회사를 세운 이유는 단순히 몇 종목을 공매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매도 포지션과 매수 포지션을 오가던 전형적이 트레이더였고, 주식보다는 채권을 더 많이 거래했으며, 자신의 명성을 앞세우지 않고 월스트리트의 모든 이들을 친절하게 대했다. 제이콥 리틀의 이야기 보다 재미있는 월스트리트의 비화는 없을지도 모른다.
<출처: Global Financial Data, “Jacob Little and the First Stock Corner”>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제이콥 리틀과 최초의 주식 매점(買占)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