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
1920년대 은행들은 넉넉한 대출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대기업들은 대출보다는 주식 시장과 채권 시장을 통해 필요한 자금 대부분을 조달했다.
결과적으로, 은행들은 새로운 대출처를 찾아 나섰다. 여기에는 주식 시장 투기꾼들도 해당되었다. 주식 시장이 상승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대출이 견실한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1929년 10월 시장이 폭락하자, 많은 대출이 채무 불이행에 빠졌다. 금융 산업의 역사에서 1930년대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을 것이다. 시장 붕괴 이후 수천 곳의 은행이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는 대출 손실, 예금 인출, 부족한 준비금 때문이었고, 일부의 경우이긴 하지만, 1920년 행한 투기적 투자로 인한 손실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공황 당시 예금 인출을 위해 늘어선 사람들)
자본이 충분하고 잘 경영되던 은행들도 전국을 휩쓴 금융 공황을 견디지 못했다. 1932 년 6월 시카고 최대 은행 퍼스트 내셔널에서도 예금 인출 사태가 시작됐다. 이 은행이 부실하다는 주장이 담긴 신원 미상의 전단이 뿌려진 후였다.
1931년 10월 내셔널 뱅크 오브 커머스(National Bank of Commerce)의 총재 제시 존스(Jesse Jones)가 은행 총재들과 비밀 회동을 갖고, 125만 달러를 모아 파산한 은행들을 지원하자고 주장했다.
일부 은행가들은 그나마 부족한 자본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존스는 은행 두 곳만 파산하더라도 도시 내 전체 은행들에게 파급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침내 구제안이 합의되었고, 여기에는 존스의 내셔널 뱅크 오브 커머스가 파산 가능한 은행 한곳을 흡수한다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존스의 리더십에 힘입어, 대공황 기간 동안 휴스턴에서 단 한 곳의 은행도 파산하지 않았다.
(내셔널 뱅크 오브 커머스의 총재 제시 존스)
2차 세계대전
1933년 4천 곳이 넘는 은행이 파산했지만, 금융 산업은 서서히 시장 붕괴의 트라우마에서 회복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1934년이 되자 파산한 은행은 61곳으로 줄어들었고, 이후 8년 동안 매년 평균 53곳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 1941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미국의 상업 은행들은 다시 한 번 10달러 상당의 소액 전쟁 채권 유통 기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 인구 중 60% 이상이 전쟁 채권을 보유하게 되었고, 금액으로 총 1,860억 달러에 달했다. 전쟁 기간 중 수십만의 은행 직원들도 군에서 복무했다.
금융의 세계화
전후 금융 시장이 서서히 세계화되기 시작했다. 1965년 당시 해외에 지점을 개설한 미국 은행은 단 12곳에 불과했다. 여기에는 JP 모건 체이스의 전신이었던 체이스 맨해튼 뱅크, 케미컬 뱅크, 퍼스트 내셔널 뱅크 오브 시카고, 매뉴펙춰러스 하노버 트러스트 및 모건 개런티 트러스트가 포함된다. 체이스의 전후 확장은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육군 정보 장교로 복무한 후 1946년 해외 담당 부서의 부팀장으로 이 은행에 합류했다.
(데이비드 록펠러)
그는 1949년 체이스의 부사장, 1961년 사장 그리고 1969년 CEO로 승진했다. 1947년 체이스는 미 군당국의 요청으로 전후 최초로 독일과 일본에 지점을 개설했다. 이들 지점은 기존 런던과 파리의 지점들과 제휴했으며, 이후 전 세계에 소속 추가 지점을 개설했다. 1970년대 체이스는 40곳의 신규 지점, 대표 사무소, 계열사, 자회사 및 합작 회사를 개설했다. 여기에는 1973년 개설된 역사적인 두 곳이 포함된다.
모스크바에 대표 사무소를 개설하면서, 1920년대 이래 소련에 개설된 최초의 미국 은행이 되었고, 1949년 중국 혁명 이후. 최초로 중국 뱅크 오브 차이나와 외환 결제 제휴를 맺었다.
전산화
JP 모건 체이스의 일부 전신들이 홈 뱅킹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0년 뱅크 원은 초기 온라인 홈 뱅킹 서비스 중 하나를 개발하고 시험했다. 채널 2000이라는 이 서비스는 은행 고객들이 TV 화면을 통해 은행과 백화점 계좌를 보면서 결제와 이체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서비스는 일반 전화선을 통해 이뤄졌다. 오늘날 홈 뱅킹에 사용되는 인터넷은 1987년까지는 상용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3년 케미컬 뱅크는 “프론토(Pronto)”를 통해 최초로 본격적인 온라인 뱅킹 서비스를 시작했다. 고객들은 가정용 컴퓨터, 모뎀 및 소프트웨어를 통해, 청구서 납부, 자금 이체, 계좌 잔고 확인, 수표 발행 상한 및 잔고 검토를 할 수 있었다.
(캐미컬 뱅크의 홈 뱅킹 서비스 프론토 광고)
케미컬 뱅크는 처음 뉴욕에서 이 서비스를 시작한 후, 전국 은행들에 라이선스를 제공했고, 이어 중소기업용 서비스도 도입했다. 체이스 맨해튼 뱅크는 1985년 “스펙트럼(Spectrum)”이란 전자 홈 뱅킹 서비스를 시작했다. 고객들은 이 서비스를 통해 은행 거래는 물론, 체이스와 제휴한 증권사를 통해 주식도 거래할 수 있었다.
새로운 2000년대
2014년 10월, JP 모건은 상품 거래 부문을 8억 달러에 머큐리아(Mercuria)에 매각했다. 일부 원유 및 금속 잔고와 기타 자산을 제외하고 초기 평가 가치 35억 달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2016년 3월, JP 모건은 선진국의 석탄 산업과 발전소에는 자금을 제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16년 9월, JP 모건은 인베스트클라우드(InvestCloud)에 지분을 투자했다. 또한 같은 해 “쿼럼(Quorum)”이라는 이더리움 네트워크의 개인용 인가 버전을 개발 중이라고 발표했다.
2016년 12월, 웬델(Wendel) 투자 회사의 전직 임원 14명이 세금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JP 모건 체이스 또한 공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장-베르나르 라폰타(Jean-Bernard Lafonta)는 내부자 거래와 허위 정보 유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50만 유로의 벌금이 부과됐다.
2017년 3월, JP 모건 체이스의 전 직원 로렌스 오브라카닉(Lawrence Obracanik)이 500만 달러 이상의 공금을 횡령해 개인 채무 변제에 사용한 혐의를 인정했다.
2017년 6월, COO 매트 자메즈(Matt Zames)가 은행을 떠났다.
2017년 12월, 나이지리아 정부는 JP 모건을 상대로 8억 7,500만 달러 상당의 소송을 제기했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JP 모건에 의해 이 돈이 부패한 전직 장관에게 흘러갔다고 주장하면서, “너무 태만한” 조치였다고 비난했다.
자료 출처: Foton Bank, “J.P. Morg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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