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이하 “VOC”)는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규모 또한 역사상 최대였을 것이다. 이 회사는 1602년 네덜란드 총독부로부터 21년 아시아 무역 독점권을 얻어내면서 설립되어 1796년 해산될 때까지 거의 200년 동안 존속했다.
VOC는 200년 동안 거의 100만 명을 아시아에 보냈다. 이는 나머지 유럽 국가들을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였다. 또한 약 5,000척의 선박을 거느렸고, 향신료 무역으로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였다. VOC는 일부 국가보다도 더 컸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200년 동안 자본주의의 금융 중심지 역할을 했는데, 거기에는 VOC의 역할이 컸다. 이렇게 VOC는 금융 시장을 넘어 전 세계를 변화시켰다.
아시아 무역을 주도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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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의 기반은 1590년대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독점에 네덜란드가 도전하면서 마련되었다. 이 모험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일부 선박의 400%의 수익을 가져오기도 있고, 투자자들은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하고 싶어 했다.
1602년 VOC가 설립되기 전까지, 개별 선박은 상인들의 자금 지원으로 움직였다. 일종의 합자 회사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해당 선박이 회항했을 때 해산되었다. 상인들은 동시에 여러 척의 선박에 투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박 한 척이 회항하지 못해도, 파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일종의 포트폴리오였다. VOC가 설립되자, 수백 명의 투자자가 동시에 수백 척의 선박에 투자할 수 있게 되어,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영국이 1600년 한발 앞서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를 설립했고, 1602년 네덜란드가 뒤따라 동인도 회사(VOC)를 세웠다. 네덜란드는 새 회사에 국가 요새 건설, 군대 보유 및 아시아 국가들과의 조약 체결을 허가했다. 바야흐로 VOC는 군산 복합체의 원조였다.
VOC는 아시아 전역으로 빠르게 뻗어나갔다. VOC는 자카르타와 그 밖의 네덜란드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에 기반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무역을 허용한 유일한 외국 회사였다. 이 회사는 인도 말라바르 해안을 따라, 포르투갈을 제치고, 스리랑카와 남아프리카의 희망봉 및 아시아 전역에서 무역을 펼쳤다.
1670년대 타이완에서 입지를 잃고 영국과 다른 식민국들과 경쟁이 치열해지기 전까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600년대 금리 하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후 수익은 계속되었지만, 마진은 점점 더 낮아졌다.
아래 차트는 VOC 매출 증가 추세를 보여준다. 1650년~1680년 약 750만 길더(약 300만 달러)였던 매출이 1720년경 약 2,000만 길더(약 800만 달러)로 증가했고, 이런 추세가 1780년까지 계속되었다.
저금리 상황으로 VOC는 채권을 발행해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높은 배당금을 지급했고, 때로는 자금을 차입해서라고 배당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재투자할 자본이 줄어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시아 전역의 전초 기지를 유지하는 데 상당량의 간접비가 소요되는 점을 감안할 때, 자금 차입과 자본 부족은 궁극적으로 회사의 기반을 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해산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80년대까지 VOC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 거대한 다국적 기업으로 존재했다.
1780년~1784년 동안 치러진 4차 영국 vs. 네덜란드 전쟁은 VOC의 재정 상태를 망가뜨렸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1795년 암스테르담 점령으로 이어졌다. VOC는 새로 세워진 바타비아 공화국에 의해 1796년 3월 1일 국유화되었고, 모든 인허가권은 1799년 12월 31일 자로 만료되었다. VOC의 아시아 지역 재산권은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에 양도되었고, 영국 동인도 회사가 VOC의 기반 시설을 인수했다.
금융 혁신을 불러온 V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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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는 금융 자본주의를 영원히 바꿔놓았다. 그것도 일부 소수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VOC가 나타나기 이전에도 회사들이 주식을 발행했었지만, VOC는 주주 유한 책임이란 방식을 들고 나와, 회사들이 대규모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유한 책임이 필요했던 이유는 회사가 망하면 소액 투자자들뿐만 아니라 대주주들까지도 망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혁신이 자본주의를 영원히 바꿔놓았지만, 여러 면에서 VOC 자신은 탈바꿈하지 못했고, 결국 몰락을 초래한 단초가 되었다. 200년 존속 기간 동안 이 회사의 자본금은 약 640만 플로린(약 230만 달러)으로 거의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신주를 발행해 자본금 증액하는 대신, 자본 재투자에 의존했다.
그런데 배당 정책이 자본 재투자의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회사는 차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1630년대 처음으로 채권을 발행해, 부채/자본 비율을 2배로 늘렸다. 1730년대까지 이 수준이 유지되다가, 1760년대 약 4배로 늘린 후 다시 1780년대 약 18배로 급격히 증가시켰다. 그리고 결국 국유화와 해산의 길을 걷게 되었다.
1600년대와 1700년대, 네덜란드는 전 세계에서 자본 비용이 가장 낮은 나라였다. “빚을 갚으면, 해당 채권자는 장래에 더 낮은 금리로 보상할 것”이라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페인, 프랑스 및 다른 왕국들의 자본 시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 나라는 채무 불이행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 금리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네덜란드의 재정 건전성으로 인해, 네덜란드 국채 금리는 1517년 20%에서 1600년 8.5%로, 1700년 다시 4%로 떨어졌다. 당시 네덜란드의 금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낮았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VOC 같은 합자 회사뿐만 아니라, 외국 국채에도 투자해, 미국 혁명에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10년 만기 국채 금리>
VOC의 또 하나 흥미로운 면은 배당 정책이었다. 일부는 현금이 아닌 현물로 지급되기도 했으며, 배당금의 형식은 아래 차트같이 아주 다양했다. 200년 존속 기간 동안 배당률은 평균 약 18%였지만, 1782년 이후에는 배당금이 지급되지 않았다.
VOC는 투자자들에게 높은 수익률을 제공했지만, 언제나 주주들이 원하는 방식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VOC는 기본적으로 잉여 재고 물품을 주주들에게 분배했는데, 주로 농산물, 정향, 향료 또는 채권이었다. 일부 주주들은 분배 물품을 거부하기도 했다. 주주들은 분명 물품이 아닌 현금을 원했고, 영란 은행, 영국 동인도 회사 및 남해 회사 이 영국 회사 3곳은 이를 교훈 삼아 1700년대 동안 배당금은 오직 현금으로만 지급했다.
배당률은 평균 20~30%로 높았지만, 존족 기간 대부분 동안 주가가 약 400 수준이었기 때문에, 아래 차트에 나타난 것처럼, 실제 배당률은 약 3~6%로 네덜란드 국채보다는 높았다. 하지만 러시아나 스웨덴과 같은 “신흥 시장” 국가의 국채보다는 낮았다.
아래 차트에서 알 수 있듯이, VOC의 주가는 1602년 100으로 시작해, 1607년 200으로 상승했고, 1609년 급락을 겪은 후, 1630년 다시 400으로 상승하면서, 매년 회사의 운명이 바뀔 때마다 같이 변동을 겪었다. 1720년대 시장 거품 당시에는 1,000을 넘어서기도 했다가, 다시 600까지 하락했고, 1730년에 800까지 상승한 후 서서히 하락을 거듭했다. 아마 VOC의 주가 차트보다 1800년 이전의 네덜란드 경제 또는 세계 경제를 잘 보여주는 자료는 없을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주가 1602~1795년>
(세계 금융 자본은 다시 런던으로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비상과 추락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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