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헤지 펀드 매니저로서 워런 버핏

토비아스 칼라일은 ‘딥-밸류(deep-value)’ 가치 투자가 전통적인 가치 투자보다 더 낫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청년 시절의 워런 버핏을 사례로 든다. 버핏은 1957년부터 1969년까지 ‘버핏 파트너십’이란 헤지펀드를 운용했다. 그리고 엄청난 수익률을 올렸다. 버핏은 1999년 비즈니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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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경력에서 최고의 수익률을 올렸던 때는 1950년대였습니다. 다우지수를 KO 승으로 이겼을 때였으니까요. 수치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자본금 1백만 달러 정도면 1년에 50% 정도의 수익률은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장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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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핏이 파트너십 펀드를 운영하는 동안 기록한 수익률은 연평균 31%였고, 투자자들을 부자로 만들어 줬다. 차트로 보면 더 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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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핏의 첫 번째 대규모 투자는 업력 75년의 지도 제작 회사 샌본 맵(Sanborn Map) 이었다. 이 회사는 한때 연간 7백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올리던 인기주였다. 하지만 1950년대가 되자, 경쟁회사들이 신기술로 더 좋은 제품을 내놓았고, 샌본 맵의 연간 영업이익도 100만 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영업이익이 80% 이상 감소한 것 외에도, 이전 8년 동안 5차례나 배당금을 삭감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시장은 이런 주식을 반길 리 없었고, 칼라일의 표현처럼, ‘재그’로 방향을 틀었다. 반면 버핏은 더 깊이 들여다봤고, 시장과 반대로 ‘지그’라는 입장을 택했다. 버핏이 주목했던 것은 주당 65달러에 이르는 현금과 투자 자산이었는데, 샌본 맵의 주식은 45달러에 거래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경영권은 제외하더라도, 1달러짜리를 69센트에 살 수 있는 기회였다. 투자자라면 1달러짜리를 50센트에 사야 한다는 간단한 아이디어를 알려준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의 조언과 맞아떨어지는 기회였다.

​1958년 버핏은 가능한 한 최대로 이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결국 43% 이상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버핏은 회사 이사회에 주당 65달러를 주주에게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사회는 거절했고, 버핏은 자기 회사 지분을 이용해 이사회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사회에 들어선 후 주가가 하락한 이유 중 하나를 찾아냈다. 다른 이사들은 샌본 맵의 고객사에 고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샌본 맵 주식은 거의 보유하지 않았고, 단지 지도 가격을 올리지 않는데만 관심이 있었다.

​이어서 버핏은 회사를 상대로 떠나길 바라는 투자자들의 지분을 인수하라고 제안했다. 버핏과의 의결권 대결을 두려워한 이사회는 버핏의 처음 제안을 수락했고, 주주들에게 주당 65달러 상당을 지급했다. 이를 통해 버핏은 주당 45달러 대비 44.4%의 수익률을 올렸다. 칼라일이 말한 것처럼, 오마하의 현인에게 이런 수익률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시장은 샌본 맵을 실패한 지도 회사로 보았던 반면, 버핏은 이 회사의 자산 가치를 보았고, 거기서 금맥을 발견한 것이다.

​버핏 파트너십 펀드의 두 번째 베팅은 터빈, 펌프, 탱크, 농업 및 비료 살포 장비 제조 회사인 뎀스터 밀 매뉴팩처링(Dempster Mill Manufacturing) 이었다. 버핏이 이 회사를 처음 발견했을 당시, 고객들의 수요보다 더 많은 터빈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 결과 재고량이 많아졌지만, 회사는 계속해서 터빈을 생산해 냈다.

​이로 인해 수익성이 떨어졌고, 시장은 주가를 끌어내렸다. 버핏은 이 회사의 장부상 유형 자산의 가치를 주당 50달러 내지 75달러로 추정했고, 주식은 16달러에 거래되고 있었다. 버핏은 이 회사가 큰 영업이익을 올릴 거로는 예상하지 않았지만, 재고를 통제하게 되면 수익성 있는 투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버핏에게는 인내심과 원칙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1956년부터 5년 동안 꾸준히 주식을 매수해 나갔다. 그의 매수 단가는 평균 28달러였고, 여전히 내재가치 대비 크게 낮은 수준이었다. 이 회사 역시도 부실 경영 상태와 어려운 산업 환경에 직면해 있었다. 경영진은 계속해서 재고 문제를 외면하고 있었다.

버핏은 이번에도 지배 주주라는 점을 이용해 뎀스터의 이사회에 진출했고, 재고와 기타 자산을 매각하라고 강요했다. 회사는 재고를 매각했고, 거기서 나온 현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했다. 이번에도 청년 버핏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헤지 펀드의 운용 자산은 처음 2,000만 달러에서 세 배로 성장했다.

​버핏은 포트폴리오를 네 가지 그룹으로 나누고 있었다.

  • 일반 그룹: 할인된 가격에 매수할 수 있었던 일반적으로 저평가된 기업의 주식.
  • 워크아웃 그룹: 배당, 청산, 자사주 매입 등 이사회의 결정으로 주주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업의 주식
  • 기업 지배권 그룹: 경영에 문제가 있어 저평가된 주식으로, 뎀스터의 경우처럼, 지배 주주로 올라서 경영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기업의 주식.
  • 편승 그룹: 플러스 그룹으로, 다른 투자자, 예를 들어, 행동주의 투자자가 이미 참여해 정상화시키려고 노력 중인 곳의 지분을 취득해 개입한 기업의 주식

​청년 버핏은 헤지 펀드 매니저로서 얼마나 훌륭했을까?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12년 동안 연평균 31%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그는 투자자들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1969년 버핏 파트너십의 문을 닫았다. 운용 자산 규모가 1억 달러를 넘어서면서 펀드의 규모가 너무 커졌다는 이유였다.

​즉, 1969년 버핏은 한 투자에 300만 달러 이상을 투자하면서 기존의 수익률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당시 주식 시장도 2018년과 비슷하게 강세장이 계속되고 있었고, 저평가된 주식이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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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일은 ‘어콰이러스 멀티플’에서 청년 버핏의 훌륭한 수익률을 바탕으로, 당시 버핏의 “담배꽁초식” 투자 방식이 후반기의 투자 방식보다 더 나았음을 보여준다. 즉 ‘훌륭한 가격의 적당한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적당한 주가의 훌륭한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칼라일은 ‘딥 밸류’ 가치 투자의 옹호자이며, ‘훌륭한 가격의 적당한 기업’을 ‘어콰이러스 멀티플’이라고 부른다.

​자료 출처: Guru Focus, “Tobias Carlisle: Warren Buffett as a Young Hedge Fund Mana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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