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케일만큼 섹시했던 셀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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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셀러리가 건강 강장제로 인기를 얻으면서, 인스타그램에도 셀러리 주스 사진이 자주 올라오고 있다. 셀러리가 육체적 질병의 원인을 치료할 수 있는 기적의 묘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학계에서는 의심스럽게 보지만, 밝은 녹색의 셀러리 주스는 사진도 잘 받고, 건강해 보이기도 한다.

현재 셀러리 주스 열풍에는 한 남성의 힘이 아주 컸다. “메디컬 미디움(Medical Medium)”의 앤서니 윌리엄은 어린 시절부터 신비한 목소리가 건강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고 있고, 그중에서 셀러리 주스의 치료 효능에 대해 처음 들었다고 주장한다. 셀러리 주스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말하는 윌리엄의 책은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과 더불어) 최근 몇 주 동안 아마존 베스트셀러 10위권에 들기도 했다.

하지만 주스가 아닌 형태의 셀러리에는 그런 매력이 없다. 요즘 셀러리는 블러디 매리 칵테일이나 전채 요리로 주로 먹는다. 하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과거에 지금의 투스칸 케일이나 에어룸 토마토 같은 고급 식재료 취급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셀러리 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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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 식물에서 중심 작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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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셀러리가 습지에서 자란다. 고대 지중해에서부터 채소로 재배되기 시작했지만, 1800년대 초가 돼서야 영국 동부의 습기 많고 추운 지역의 농가들이 재배를 시작하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헤더 안트 앤더슨(Heather Arndt Anderson)은 “Taste”에서 셀러리의 매력을 이렇게 요약한다.

기르기 까다롭고, 입수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 상류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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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리 파는 여인” - 존 잉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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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Proof”를 통해 셀러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기자 마야 크로스(Maya Kroth)에 따르면, 원래 셀러리의 품종은 수십 종에 달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슈퍼마켓에서는 볼 수 있는 균일한 밝은 녹색 줄기를 모습과 달리, 노란색, 빨간색 또는 줄무늬가 있는 다양한 모습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특히 흰색 셀러리가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뿌리를 햇빛으로부터 차단시켜 엽록소의 발생을 막았다(오늘날 농가에서 흰색 아스파라거스를 재배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셀러리가 꽃처럼 장식용으로도 사용됐다. 셀러리를 특별한 꽃병에 꽂아 감상했고, 식탁 위에 셀러리 꽃병이 놓인 것이 지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이국적인 신선한 채소를 얻었다면, 훌륭하게 장식해 놓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셀러리 꽃병은 순전히 장식용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식사 중에 손님들은 입가심 용으로 줄기를 조금씩 베어먹었다.



(“이슬방울” 문양이 장식된 셀러리 꽃병 1886~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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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셀러리는 실용적이지 못한 꽃병 모양에서 납작한 배 모양의 접시에 놓이게 되었다. 상류층의 유리그릇 취향은 그만큼 변덕스러웠다.

미국에 상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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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후반이 되자, 셀러리 열풍은 미국 미시간의 칼라마주까지 퍼졌고, 이곳은 셀러리를 재배하기에 이상적인 습한 토양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셀러리는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곧 칼라마주는 “셀러리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거리 골목과 기차역에는 셀러리를 파는 보따리장수들로 가득했다.”라고 앤더슨은 쓰고 있다.

미국인들은 추운 곳에서 자라는 이 새로운 채소에 매료되었다. 셀러리는 11월에서 3월까지가 재배 기간이기 때문에, 겨울 동안 먹을 수 있는 신선 채소 중 하나였고, 연말연시 식탁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이후 셀러리는 올리브와 더불어 추수 감사절에 즐겨먹는 칠면조 옆을 차지하게 되었다. 2014년 보스턴 닷컴이 소개한 셀러리 요리의 역사라는 글에 따면, 1970년대 웨이트 왓처스(Weight Watchers)가 셀러리를 다이어트 식품으로 소개한 후부터, 셀러리가 추수감사절에만 먹는 음식에서 벗어나 일상의 음식이 되기 시작했다.



(셀러리를 곁들인 칠면조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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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동시에, 대규모 농업 방식으로 셀러리 재배가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현재 유일한 밝은 녹색 품종인 그린 파스칼(Green Pascal)은 배송하기 좋게 아주 튼튼했다. 20세기 중반이 되자, 셀러리는 아주 일반적인 채소가 되었고, 이국주의인 느낌은 사라졌다.

유명한 셀러리 요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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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에는 샐러리를 식사 중간에 신선한 상태로 식탁 위에 올려졌지만, 1830년대부터 1900년대 중반까지 그 자체로도 인기 메뉴였고, 다양한 형태로 요리되었다. 1840년대부터 현재까지 17,000가지 이상의 메뉴를 모아놓은 뉴욕 공립 도서관의 “What’s On the Menu” 웹 사이트(아래 링크 참조)에 있는 레스토랑 메뉴 중 가장 흔한 것 중 하나가 셀러리다. 이 웹사이트의 큐레이터 레베카 페더만(Rebecca Federman)은 셀러리를 다룬 팟캐스트에 출현해, 셀러리가 캐비아보다 가격이 비쌌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http://menus.nypl.org/

종종 신선한 샐러리는 치즈를 곁들여 먹기도 했다(가정에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간식으로 셀러리 위에 크림치즈를 발라서 주곤 했으며, 1950년대 들어 “앤츠 온 어 로그(ants on a log)”라는 이름의 셀러리 위해 땅콩버터를 바르고 그 위에 건포도를 얹은 음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Taste”에 따르면, 셀러리는 단품 메뉴로도 인기가 있었으며, 신선한 그대로뿐만 아니라, 푹 삶아 육즙을 느낄 수 있는 벨루테(velouté)나 진한 데미그라스 형태의 에스파놀(Espagnole)로 식탁에 올랐다. 1895년 뉴욕 타임스의 추수감사절 요리로 추천한 “셀러리와 마요네즈”는 셀러리를 잘라 마요네즈를 바르고 다시 셀러리로 장식한 요리였다.



(앤츠 온 어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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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리의 효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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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리의 효능은 “메디컬 미디움”을 통해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1900년경부터 샐러리는 통증과 불안에서부터 신장 질환 및 류머티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증상의 치료용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셀러리를 넣은 검과 강장제가 불면증, 말라리아 및 두통 치료제로 광고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셀러리 강장제는 브루클린의 음료 회사 닥터 브라운(Dr. Brown)에서 1868년 처음 내놓은 것이었다. 온라인 매체 아틀라스 옵스큐라(Atlas Obscura)에 따르면, 이 셀러리 강장제는 “뉴욕의 로어 이스트 사이트와 윌리엄스버그에 살던 유태인 이민자 자녀들을 위해 설탕, 탄산수 및 셀러리 씨 가루로 만들어졌다. 1900년 대에 들어와 FDA에서 일반 음료에 강장제(tonic)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자, 닥터 브라운의 셀-레이(Dr. Brown’s Cel-Ray)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판매되기 시작했다.

셀-레이는 오늘날까지 뉴욕시에 사는 유태인들이 즐겨 마시고 있으며, 특히 파스트라미(양념한 소고기를 훈제한 것) 샌드위치와 잘 어울린다고 한다.



(닥터 브라운의 셀레이와 파스트라미 샌드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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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Quartz, “CELERY WAS ONCE AS SEXY AS K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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