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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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VOC는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도 변화시켰으며, 선물 계약, 옵션, 공매도, 심지어는 최초의 약세 매도[주식이나 자산의 가격을 하락시키기 위해 집중적으로 대주(또는 공매도)하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혁신이 도입되었다. VOC 초기 시절 최대 주주였던 ‘이삭 르 마리’는 주식 역사상 최초로 약세 매도를 시작했고, VOC 주식을 공매도한 다음 되사서 이익을 남기려고 했다.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
이러한 행동들이 주식 시장에 대한 최초의 정부 규제를 불러왔고, 1621년, 1623년, 1624년, 1630년 및 1632년 각각 공매도는 물론 옵션 등 금융 신상품의 거래 금지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이런 조치가 수차례 내려졌다는 사실은 규제가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의 장기적 성공에 걸림돌이 되던 한 가지 문제는 거래소에서 거래되던 주식이 VOC와 서인도 회사(WIC) 주식뿐이었다는 점이다.
1600년에서 1800년 사이 암스테르담에 새로 상장된 대기업은 없었다. 네덜란드의 재정 건전성이 유지되면서 부채와 금리가 낮긴 했지만,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의 성장을 저해하는 역할도 했다. 왜냐하면 거래소에서 채권 거래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분권화된 정치적 특성으로 인해, 채권도 지방 정부별로 발행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처럼 중앙에서 발행한 채권이 없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의 성장을 돕지 못했다. 프랑스가 중앙 집중화된 만큼 네덜란드는 분권화된 나라였다.
VOC와 WIC가 주식 시장을 독점했기 때문에, 신주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을 하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채권 규모도 작았고, 또 지방 정부별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자본의 출구를 찾기 위해 외국 채권에 투자했다. 1700년대 네덜란드 신문에는 종종 런던에서 거래되던 영국 채권, 영국 주식, 영국 동인도 회사 및 남해 회사 주식뿐만 아니라 파리에서 거래되던 프랑스 채권 가격을 전하곤 했지만, 암스테르담의 다른 채권이나 주식에 대한 소식은 없었다.
식민지 무역을 제외하고, 1800년대까지 어떤 자본주의 기업가도 VOC와 WIC에 자본 수준을 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네덜란드의 자본은 주식 대신 채권으로 흘러들어 갔다. 스웨덴, 프랑스, 영국, 러시아, 작센, 덴마크, 오스트리아 및 기타 유럽 국가를 비롯해 미국까지도 자본 조달을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달려왔다. 이는 네덜란드 투자자들에게 더 높은 수익률을 가져다주었지만, 네덜란드 경제 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아래 차트에 나타난 것처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수익성은 아주 불규칙했다(2.5길더가 1달러에 해당). 오랜 기간 수익이 성장했지만, 또 오랜 기간 수익이 감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배당금을 지급했고, 그에 따라 회사 자본의 고갈을 가져왔으며, VOC는 점점 더 많은 자금을 차입할 수밖에 없었다.
(VOC의 수익과 손실)
VOC의 종말을 예고한 전조는 1780년~1784년 동안 치러진 4차 영국 vs. 네덜란드 전쟁으로, 1770년대~1780년대 회사의 재무 상태가 악화된 것이었다. 이후 이런 상황은 개선되지 못했고, 나머지 기간 동안 손실 일로를 걸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네덜란드는 프랑스에 정복당했고, VOC의 자산은 영국에 몰수 당했다. 그런 끝에 1796년 세상에서 사라졌다.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의 확장을 막았던 또 다른 요인은 주식 상장이 월별 또는 분기별로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상황은 런던의 상황과는 달랐다. 런던의 경우 매일 주식과 채권 상장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전도 가능했다.
반면, VOC 주식 중 상당량이 전혀 거래되지 않았다. 1600년대와 1700년대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의 채권 규모가 증가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신규 투자자가 필요했다. VOC의 자본이 성장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1700년대 후반까지 네덜란드 중앙 정부의 국채도 존재하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은 투자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런던행을 택한 세계 금융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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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혁명 이전의 기업들은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거래소에 거래되는데 필요한 자본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해운업은 오랜 기간 위험이 큰 모험사업이었고, 고수익을 가져다주는 만큼 손실을 입을 가능성도 높았다. 때문에 투자자들은 다양한 선박에 돈을 투자해 위험을 분산시켰다.
1600년대와 1700년대 식민지 무역에 종사한 회사들은 다양한 곳에서 자본을 조달했기 때문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수백 곳의 해운 회사에 투자해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세계 금융의 중심은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록 수십 년이 걸리긴 했지만, 세계 금융의 중심이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빠르고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운 점이다.
나폴레옹 전쟁, 프랑스에 의한 점령, 전후 식민지 소멸 같은 정치적 문제는 암스테르담으로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네덜란드가 1815년 이후에도 암스테르담을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유지할 방법이 몇 가지 있었지만, 추세는 불가피했다.
1) 네덜란드는 VOC 및 WIC 주식 이외에 다른 회사들의 주식 상장을 유도해 지역 자본 시장을 적극 활용해야 했다.
2) 중앙 정부가 충분한 국채를 발행해 채권 시장을 발전시켜야 했다.
3) VOC는 자본 확장 대신 차입 택함으로써 결국 파멸로 향하는 단초를 만들지 말아야 했다.
4) VOC와 WIC는 배당금을 줄이고, 이를 성장을 위해 재투자해야 했다.
5) 런던에서처럼, 많은 유가 증권을 상장시켜 거래를 활성화해야 했다.
VOC는 필요할 때 추가로 자본을 늘리거나, 차입을 줄이거나, 배당금을 줄여 이를 재투자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프랑스, 영국 및 러시아처럼 중앙 정부에서 국채를 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는 VOC와 WIC가 몰락한 후 중요성이 점점 사라져갔다. 암스테르담에서 활발히 거래되던 외국 국채 또한 1820년대 자본 조달이 더 용이한 런던으로 자리를 옮겼다.
(런던 증권 거래소)
암스테르담이 왜 이 모든 변화를 예견하지 못하고, 1815년 이후 벌어진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세계 금융 자본의 이동을 충분히 막지 못했는지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런던은 이를 교훈으로 삼았다.
런던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뉴욕에게 자리를 내줄 때까지 19세기 동안 세계 자본주의의 엔진 역할을 했다. 미국도 이 교훈을 이해하고 있었다. 세계의 금융 중심은 계속 성장하고, 혁신하며, 가능한 한 개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심은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자료 및 차트 출처: Gloval Financial Data, “The First and the Greatest: The Rise and Fall of the United East India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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