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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 일본은 지난 200년 동안의 느슨한 쇄국정책을 끝냈다. 1630년대부터 당시까지 일본인들은 네덜란드 및 중국과만 공식적인 무역을 해왔다. 게다가 이 두 국가 역시 일본 내에서의 행동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나가사키 항구의 인공섬 데지마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고, 중국인들은 나카사키 차이나타운에만 머물 수 있었다.
이윽고 미국과 더불어 철도가 일본에 도착했다. 1854년 미국 해군 제독 매튜 페리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조약 협상을 위해 두 번째로 일본을 찾았을 때, 4분의 1 크기의 증기 기관차를 선물로 가져왔다. 1853년 러시아 역시 일본과 협상을 벌이는 동안 증기 기관차를 가져왔다. 이것이 일본 철도 역사의 시작이었고, 이때부터 철도 산업의 혁신이 시작되어 결국에는 신칸센과 자기부상 열차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페리가 선물한 증기 기관차의 두루마리 그림(1854년). 현재 대영 박물관 소장]
[페리의 증기 기관차를 그린 또 다른 그림(브라운 대학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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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 기관차는 일본인들을 사로잡았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 정부(도쿠가와 막부)는 서양식 증기 엔진을 주문했었다. 1853~1854년 개국하기 전에도 배운 사람들은 증기 기술을 알고 있었다. 18세기가 시작될 때부터, 란가쿠(蘭學, 일본 에도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지식을 연구한 학문)라는 지식 운동이 있었다.
일본은 거의 모든 서양 지식을 네덜란드인들로부터 얻었다. 18세기 초가 되자, 도쿠가와 막부는 일부 서양 문물을 일본 내로 반입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자료가 국내에 전파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지, 기술 관련 정보는 금지 대상이 아니었다.
[‘서양의 이상한 장치’라는 책에 실린 그림(1840년대에 완성되었지만, 1854년에 출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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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이전에 서양의 지식이 들어왔다는 것은 일본에서 철도 산업이 성공을 거둔 이유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통찰을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 시대 일본에서 문맹 퇴치율이 비교적 높았다는 점도 크게 기여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초기에는 도시가 성장했다.
전쟁 시대의 성곽 마을이 지역 행정 중심지로 모습을 바꿨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일본은 농경 유교 관료사회였다. 농촌 지역 엘리트 무사였던 사무라이들이 도시로 이주했고, 유교 경전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저팬 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수도 에도(현재의 도쿄)의 식자율(주민 중 글을 아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에도 시대에 에도의 식자율은 남성의 경우 약 80%, 여성의 경우 25%로, 사무라이와 승려를 제외한 국가 평균인 각각 54%와 19%에 비해 크게 높았다.” 이는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확실한 기반이었다.
사실 메이지 유신 자체는 철도 산업이 발전해 온 오랜 역사 중 첫걸음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어쨌든 도쿠가와 막부 시대 말기에 일본에 철도가 도입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내분은 서양과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만든 부분적인 원인이었고, 막부 시대가 계속될 수 없을 지경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867년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부하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다시 젊은 메이지 일왕은 상징적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실제 정부를 운영한 것은 고문단이었다. 메이지 과두체제하에서는 많은 일본인들을 해외에 파견하는(대표적인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 동시에, 서양 전문가들을 초빙해 일본의 발전을 돕도록 했다.
[일본의 토머스 에디슨 ‘다나카 히사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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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진기한 물건이었다. 페리 제독 외에도, 영국과 러시아 외교관들도 철도를 일본에 들여와 증기 기술의 힘을 보여주었다. 다나카 히사시게(田中久重, 1799-1880)는 발명가이자 기업가로, 그가 세운 기업은 훗날 도시바가 된다. 1853년 그는 러시아 외교관 예프피미 푸탸틴가 들여온 증기관에 매료되었다.
히사시게는 호기심이 많았고, 란가쿠를 열심히 배웠다. 1820년대 이후 그는 서양 기술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다양한 발명품을 고안해냈다(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1851년 발명한 만년 자명종이었다). 히사시게는 푸탸틴의 증기 기관차를 본 후, 일본에 최초로 증기 기관차를 달리게 하겠노라는 야심을 가졌다.
[다나카 히사시게의 증기 기관차. 18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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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철도 산업은 실험 단계를 넘어섰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현대화와 중앙 집중화를 추구하면서, 전국에 철도망을 까는데 열정적이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은 봉건 제도와 비슷했지만, 메이지 시대는 도쿄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정부였다. 1872년 도쿄의 신바시에서 요코하마 사이에 최초의 상업용 철도가 개통되었다.
[도쿄의 유명 장소, 신바시 역의 증기 기관차(히로시게 3세의 목판화, 1875년)]
[요코하마를 출발하는 최초의 증기 기관차, 18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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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목판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신기술은 예술작품의 주제가 될 만큼 급속도로 관심이 퍼져나갔다. 일본 전통 미술 역시 철도 교통이란 신기술을 축하하는데 사용되었다. 일본의 철도 산업은 이제 본궤도에 올라섰다. 하지만 증기 기관 자체는 이후 수십 년 동안에도 일본 내에서 자체 제작되지 못했다. 1893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상용 증기 기관차가 일본 기술로 제작되었다. 여기에는 다나카 히사시게의 시대를 앞서간 실험이 큰 역할을 했다.
[클래스 860 증기 기관차 - 일본 최초 상업용 증기 기관차. 18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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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Kevin Shau, “Railroads in Late-Tokugawa and Early-Meiji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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