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이드 오들럼(Floyd Odlum)은 기회주의자였다. 그는 1929년 시장 붕괴 직후의 처절한 상황을 활용해 미국 최고 부자 대열에 올라섰다.
오들럼은 투자 신탁 회사들 속에서 기회를 찾아냈다. 투자 신탁은 지금의 폐쇄형 뮤추얼 펀드의 시조쯤으로 보면 된다.
투자 신탁 회사가 미국에 처음 나타난 때는 1926년경으로, 투자자들의 자금을 모아 주식을 거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많은 신종 투자 수단과 마찬가지로, 투자자들 사이에 인기를 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29년이 되자, 거의 640개의 투자 신탁 회사가 나타났고, 운용 자산은 약 40억 달러에 달했다. 1929년 한 해에만 시장에 신규로 유입된 자금 60억 달러 중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게다가 8월과 9월에만 투자 신탁 회사에 약 10억 달러가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수치만으로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교수가 꼽은 최악의 투자 신탁 열풍 사례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1928년 골드만삭스는 주식 투기 목적으로 골드만삭스 트레이딩 코퍼레이션을 만들었다. 골드만삭스는 지배 지분만 남기고 이 회사의 나머지 주식을 대중에게 팔았다. 그런 다음 골드만삭스 트레이딩 코퍼레이션은 쉐난도 코퍼레이션을 만들었고, 위의 과정을 반복했다. 쉐난도 코퍼레이션은 다시 블루 릿지 코퍼레이션을 만들었고, 위의 과정을 반복했다.
신규 투자 신탁 회사 설립은 모회사의 주가를 띄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투기가 일어나자, 자회사의 주가로 모회사의 주가를 부풀렸고, 그렇게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
그 여파로 투자 신탁 회사 주식은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었지만, 거품이 터지자 동전주로 전락했다. 플로이드 오들럼은 그 동전주를 쓸어 담았다.
오들럼은 변호사에서 기업가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과 친구의 자금으로 투자를 시작했다. 1920년대 강세장에서 자금은 금방 불어났고, 1928년 아틀라스 코퍼레이션이란 회사가 되었다.
아틀라스는 현금 더미를 쌓아놓고 있던 덕에 1929년 시장 붕괴에서 살아남았다.
이윽고 시장이 붕괴되자, 보유 자산 가지나 수익보다 엄청난 프리미엄으로 거래되던 투자 신탁 회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위 위조지폐 취급을 받았고, 자산 가치에 이를 때까지 하락을 멈추지 않았다. 자산 가치 대비 100%의 프리미엄이 얻어졌던 회사는 자산 가치보다 크게 할인된 상태까지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자산 가치 이하의 주가로 사들일 의지와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는 기회였다. 그들은 모회사의 주식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그 휘하의 자회사 포트폴리오도 보유하는 효과를 노렸다. 그들은 모회사의 지배 지분을 매수해 경영권을 확보한 후, 자회사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하거나, 현금화함으로써 주가 하락을 막을 수 있었다. 이것이 아틀라스 코퍼레이션이 대공황 동안 1,500만 달러를 1억 2,500만 달러로 불리고, 주가를 거의 100% 상승시킬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1930년에서 1933년 사이, 아틀라스는 블루 릿지, 쉐난도 및 골드만삭스 트레이딩 코퍼레이션을 포함해, 22개 투자 신탁을 보유 자산보다 훨씬 낮은 주가에 인수했다. 1933년이 되자, 아틀라스는 미국에서 가장 큰 투자 신탁 회사가 되었다.
아틀라스는 많은 “특수 상황”에 놓인 회사들의 지배 지분을 확보해 나갔다. 그러면서 오들럼은 대부분의 회사에서 경영진을 교체하고, 사업을 턴어라운드 시켰다. 1930년에서 1960년까지 아틀라스의 주주들은 배당금을 포함하여 연간 25%의 수익률을 올렸다(1929년 시장 고점에서 1960년까지 계산해도 연간 수익률은 15%나 된다).
물론, 오들럼의 천재성과 극심한 대공황 상황에서 크게 할인된 가격에 혐오 자산을 매수할 용기가 없었다면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자료 출처: Novel Investor, “The Man Who Made a Killing on the 1929 Cr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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