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싱어의 등장과 엘리엇의 성장 - 지옥에서 온 투자자, 폴 싱어 그리고 엘리엇 2부

싱어는 브롱크스와 뉴저지 티넥에서 자랐다. 약사였던 아버지와 주부였던 어머니 아래 세 자녀 중 하나였다. 1966년 로체스터 심리학과를, 3년 후 하버드 로스쿨을 나왔다.

처음 아버지와 함께 트레이딩을 시작했지만, 번번이 손실만 기록했다. 그는 아직도 위험 관리의 중요성을 말할 때면 당시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기업법에 대해 잠시 공부한 후 1977년 자본금 130만 달러로 엘리엇 매니지먼트를 출범했다.

싱어는 자신이 배웠던 심리학과 법학을 바탕으로, 적대적 투자라는 독특하고, 수익성 높은 브랜드를 개척했다. 엘리엇은 41년 동안 단 2차례 손실을 겪었으며, 출범 당시 1달러가 이제 179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2017년 인터뷰에서 싱어는 자기 부고 기사가 어떤 “헤드라인”으로 나오길 바라느냐는 질문에 잠시 주저하다, “그는 변화를 시도했다.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이들의 자본을 지켜주었다. 꾸준하고 안정적이었다.”라고 답했다.

싱어는 주식을 사서 오르길 기다리는 “트레이더”가 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숙이 관여하고 싶어 했다. 1980년대 몇 년 동안 정크 본드 바이아웃 붐이 일었던 당시, 엘리엇은 재무 위기에 빠져 부채 상황이 곤란해진 기업들의 “부실” 채권에 투자를 집중했다.

이 전략이 수익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끈기와 상당한 자본이 필요하다. 또한 협상 능력이 있어야 하고, 종종 법률 제도의 교묘하게 활용해야 하며, 채권을 상환 받기 위해 소송을 걸거나, 어느 채권자가 우선순위가 있느냐를 다투는 파산 법정을 오랜 기간 들락거려야 한다.

2016년 콘퍼런스에서 싱어는 자신의 투자 방식을 “회사로부터 채권을 사들이고, “우리 채권이 여러분들 보다 우선순위에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다년간 투쟁을 벌이는 것”이라면서, 그들이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 다시 몇 년 동안 위의 말을 반복해서 더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엇은 수십 개 회사의 부실 채권에 투자했는데, 여기에는 트랜스 월드 항공, 유로 터널, 리먼 브라더스, 카지노 회사 시저스 엔터테인먼트 등이 포함된다. 그중 시저스의 파산 절차에 대해 파이낸셜 타임스는 “최근 사례 중 가장 까다로운 기업 소송”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싱어가 이 분야에 뛰어났던 이유는 부분적으로 상대방의 약점을 분별하는데 능하고, 대중의 정서가 반대여도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정확한 단어를 골랐고, 부드럽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길에 뛰어들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느낀 점은 적극적인 노력(무언가 일어나게 만드는 일, 위원회를 꾸미는 일, 과정을 이끌어 나가는 일,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일, 단순히 금융 시장의 물결에만 이끌려 가지 않는 일)이 가치와 수익성의 동력, 그것도 중요한 동력일 뿐 아니라, 위험을 다스려 험한 골짜기에 떨어졌을 때도 빠져나오게 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사람들과 싸우고 싶어서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성공을 거둔 많은 다른 투자자들처럼, 싱어 또한 자신을 시장에서 숙련된 선수 이상으로 여긴다. 지식인들이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대중 조세에서부터 규제, 교육 및 외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 정책에 자기 생각이 반영되도록 한다면, 그 또한 비슷하게 행동한다. 그에게 싸움을 거는 일은 행복 이상이다.

1995년 싱어는 개발 도상국의 국채(또한 외화 표시 국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제이 뉴먼(Jay Newman)이라는 트레이더와 일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벌인 아르헨티나 정부와의 법정 분쟁이 싱어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싱어와 마찬가지로 뉴먼도 훈련받은 변호사였으며, 싱어처럼 그 또한 다른 이들은 혐오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 오랜 기간 국채는 2008년 이전의 서부 프라임 모기지의 경우처럼 은행과 기타 대출 기관이 주로 취급했다. 위험이 낮고 아주 매력적은 투자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국가들, 특히 경제가 취약하거나 정부가 부패한 가난한 국가들은 갚을 수 있는 능력 보다 훨씬 많은 국채를 발행해 돈을 끌어들였고, 1980년대 대략 50개 국가가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거나, 부채 조정을 겪어야 했다. 멕시코를 비롯한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폴란드, 필리핀, 베트남 및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대표적인 국가였다.

대부분의 경우 국제 통화 기금(IMF)이 개입해, 예산 삭감과 기타 긴축 조치를 취하도록 했고, 정부와 채권자들의 재협상을 도왔다. 일반적으로 국채 보유자들이 기존 국채를 상환 기간이 축소된 신규 국채와 교환하게 함으로써, 해당 국가가 채무 불이행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운 것이다.

뉴먼은 이러한 금융 위기에서 기회를 보았다. 채무 불이행에 빠진 국가의 국채를 아주 싼값에 매입해, 해당 국가와 협상 또는 소송을 통해 국채의 원래 조건에 따라 완전 상환을 받는 것이다. 이런 전략을 사용하는 투자자는 “불량 채권자(rogue creditor)”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전술은, 그럴 배짱이 있다면, 아주 수익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뉴먼은 갚을 능력이 없는 국가와는 절대 소송을 벌이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비평가들의 주장은 다르다. “불량 채권자들”이 채권 국가의 정상화를 방해하고, 국민의 고통과 빈곤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싱어는 처음 뉴먼을 끌어들이면서, 월급 30만 달러, 그가 제안한 투자에서 발생한 수익 중 20%를 제안했다. 1984년 페루 공화국이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졌고, 1996년 페루 정부는 국채 교환을 개시했고, 페루 국채 보유자들 중 90% 이상이 기존 국채를 원래 가치보다 50% 할인된 신규 국채로 교환했다.



싱어는 채무 불이행에 빠진 페루 국채 1,100만 달러 상당을 매수했고, 장기간의 법률 싸움을 통해 국채의 완전한 가치를 돌려받기 위해 페루 정부를 압박했다. 1998년 재판에서 연방 법원은 엘리엇이 ‘보상을 위한 소송 목적으로 물건을 살 수 없다’라는 미국 “챔퍼티 법(Dickensian-sounding Champerty laws)”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엘리엇은 즉각 항소했고, 결국 승소했다. 이후 뉴욕 주에서 챔퍼티 법을 개정하기 위한 강력한 로비에 참여했다. 또한 벨기에 브뤼셀에서 소송을 제기해, 페루 정부가 엘리엇이 보유한 국채를 상환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신규 국채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지 못하도록 시도했다. 페루에게는 내키지 않는 선택이 남았다. 신규 국채를 다시 채무 불이행에 빠뜨리거나, 뉴욕의 헤지 펀드에 몸값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결국 페루는 엘리엇에게 국채의 원래 가치와 이자를 합해, 약 6천만 달러를 지불했다. 이 엘리엇의 선례는 이후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 돈 많은 국채 투자자가 곤경에 빠진 국가의 자금 조달 능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엘리엇 사건에서 페루 공화국을 변호한 로펌 ‘베이커호스테틀러(BakerHostetler)의 파트너 마크 사임롯 변호사는 싱어가 시장의 허점을 활용한 것이라면서,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그들은 기존 시스템 안에서 행동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외화 표시 국채 전문가들은 더 이상 채무를 감당할 수 없는 국가들이 부채를 조정할 수 있게 일종의 파산 법원이 국제 금융 시스템 내에 필요하다고 오랫동안 주장 해왔다.

싱어는 페루를 상대로 자기 전략을 일종의 “스트레스 테스트”를 진행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그는 훨씬 더 큰 베팅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6억 달러 상당의 아르헨티나 국채를 약 1억 달러면 매수할 수 있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었다.

(아! 아르헨티니타여 - 지옥에서 온 투자자, 폴 싱어 그리고 엘리엇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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