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기꾼 제이콥 리틀과 최초의 주식 매점(買占) 1부: 1800년대 주식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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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앤 모리스: 첫 번째 주식 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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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의 첫 번째 쿠데타는 1835년 모리스 운하 & 뱅킹 컴퍼니(Morris Canal and Banking Company) 주식의 매점을 통해서였다. 1792년 윌리엄 듀어(William Duer)와 알렉산더 매콤(Alexander Macomb)이 퍼스트 뱅크 오브 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 주식 매점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 경제 공황을 촉발시킨 바 있다.
모리스 운하는 1822년 완공된 107마일 길이의 운하였으며, 뉴저지 북부를 관통하면서, 델라웨어 강이 있는 필립스버그를 거쳐, 허드슨강이 있는 저지시티까지 이어졌다. 이 운하를 통해 펜실베이니아의 석탄을 뉴저지로, 다시 뉴저지의 철광석을 펜실베이니아로 실어 나를 수 있게 됨으로써 운송 비용을 낮아졌다.
운하의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물품을 옮기는 데는 불과 4일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철도가 건설되어 같은 거리를 5시간 만에 도달할 수 있게 되자, 운하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어졌다.
당시 기업을 인수하기 위해서는, 현재 행해지는 것처럼 유통 주식에 대한 공개 매수 대신, 기존 주식 전부를 매수해야 했다. 리틀은 모리스 운하를 인수하려는 목적으로 이 회사 주식을 매점했다. 그 과정에 공매도 세력이 끼어들었다.
리틀과 손을 맞춘 뉴저지의 트레이더 그룹은 이윽고 모리스 운하의 유통 주식 전부를 사들이게 되었고, 공매도 세력은 숏 포지션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리틀로부터 주식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모리스 운하의 주가는 1834년 2월 20달러에서 1835년 1월 185 달러로 상승했다. 리틀은 코너에 몰린 공매도 세력에게 더 높은 주가를 요구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한다면, 공매도 세력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다른 기업들의 주식을 팔아야만 할 것이고, 이는 다시 시장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수 있는 반바지를 감추십시오. 주식 매점으로 인한 주가 상승은 아래 차트에서 볼 수 있다.
<모리스 운하 & 뱅킹 컴퍼니의 주가>
리틀은 1835년 9월 할렘 철도(Harlem Railroad) 주식 매점으로 쿠데타를 이어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할렘 주식 60,000주가 공매도된 상태였고, 남은 유통 주식은 단 7,000주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리틀은 할렘 주식을 1835년 3월 40달러에서 1835 년 9월 195달러까지 끌어올렸다.
물론, 공매도 세력은 계약 이행해 엄청난 손실을 감당하기 싫었기 때문에, 거래소 이사회에 달려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사회는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숏 포지션 청산을 위한 주가를 160달러로 정했다.
이 결정은 거래소의 향후 주식 매점 사건의 선례가 되었고, 공매도 세력은 주식 매점에 걸리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아래 차트에서 이번 주식 매점의 영향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할렘 철도의 주가>
제이콥 리틀에게는 이 두 차례의 주식 매점을 통해 “나폴레옹의 이사”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리틀은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이 뱅크 오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Bank of the United States)에 대해 작전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그로 인해 1837년 공황이 닥치라는 실을 미리 내다봤다.
리틀은 시장 전체에 대해 매도 포지션을 쌓았고, 시장 하락으로 수익을 보았다. 이를 통해 “월스트리트의 큰 곰”이라는 또 하나의 별명이 생겼다. 한 계산에 의하면, 리틀의 재산은 3천만 달러에 달했고, 미국 내 최고 부자 중 하나였다고 한다.
실패한 주식 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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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 리틀은 1846년 노리치 앤 우스터 철도(Norwich and Worcester Railroad) 주식 매점 작전에 참여했다. 그는 이 철도 회사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보스턴의 작전 세력과 힘을 합했다. 각자가 25,000달러를 담보로 걸고, 90달러 이하로는 주식을 팔지 않기로 맹세했다.
주가는 상승하기 시작했지만, 리틀은 이번 주식 매점 작전을 실패할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25,000달러의 담보를 포기하고, 손실을 줄이기 위해 80달러대에서 보유 주식을 처분했다. 리틀은 1847년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 사뮤엘 모스(Samuel Morse)가 전신 회사에 투자할 의향을 물었지만, 거절한 것인데, 그는 후일 그 결정을 후회했다.
<노리치 앤 우스터 철도의 주가
리틀에게도 주식 매점 작전에 걸려 고통을 겪은 사건이 한차례 있었다. 리틀은 이리 철도(Erie Railroad Co.) 주식을 조금씩 정기적으로 공매도하고 있었다. 1855년 스스로를 “행복한 가족(Happy Family)”이라고 부른 경쟁 세력 조직이 리틀을 잡기 위해 덫을 놓았다.
그들은 리틀이 이리 철도 주식을 공매도하는 모습을 놔두고 지켜보면서, 자기들은 주식을 매수하고 있었다. 리틀이 코너에 몰렸을 것이라고 생각해 것을 허용하여 주식 자체를 매입했다. 그들은 리틀이 궁지에 몰렸다 고 생각 한 이 가족은 리틀에게 기한을 정하지 않고 주식을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한을 정하지 않은 이유는 리틀의 실수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은 리틀이 이리 주식으로 1백만 달러 이상 손실을 보고 있다고 추정했으며, 이제 그가 대가를 치르리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행복한 가족은 뉴욕 증권 거래소 객장을 방문했고, 넬슨 로빈슨(Nelson Robinson)은 거래 가능한 주식 목록을 불렀다. 그의 입에서 이리 주식 이름이 나왔고, 주당 62달러, 이어 63달러, 64달러 그리고 65달러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리 주식을 팔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로빈슨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이리 주식의 유동성이 말라버린 사실을 깨달았다. 행복한 가족은 리틀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이콥 리틀은 가까운 곳에 서서 조용히 주식을 팔겠다고 제안했다.
1855년 당시, 주식이 중개인을 통해 증서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사무실에서 공식적으로 공식적으로 교부되어야 했다. 결전의 날이 임박했음을 안 로빈슨과 거래소의 거의 모든 이들이 다음날 제이콥 리틀이 주식을 전달하지 못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이리 철도 사무실로 달려갔다.
리틀은 사무실 문이 닫히기 몇 분 전 나타났다. 로빈슨은 그에게 “음, 우리가 이리 주식을 가방에 가득 채워 놓았네. 전부를 말이야. 자 이제 남자답게 패배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다 끝났음을 인정하게.”라고 말했다.
로빈슨과 그의 세력이 몰랐던 사실은, 리틀이 런던에서 이리 철도의 전환 사채를 매수해 당일 아침 보통주로 전환했다는 것이었다. 리틀은 자신에게 요구된 주식 전부를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매도할 주식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작전으로 리틀이 청산한 금액은 10만 달러가 조금 넘었다. 이후 이리 철도 주가는 아래 차트에 나타난 것처럼 10달러대까지 하락했다.
<이리 철도의 주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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