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사람의 손으로 - 원유 운반 파이프라인의 탄생 (3부 完)

원유 파이프라인 이야기의 마지막 3부입니다.


19세기형 파이프라인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구와 인력이 필요했다. 18 내지 20피트 길이의 파이프를 소나 말이 끄는 마차에 실어 숲으로 운반했다. 파이프도 무거웠을 뿐만 아니라, 관련 장비도 무거웠다.

강철 파이프를 나사 결합식으로 조립하기 위해, 조장의 지휘 하에 한 인부가 파이프를 들어 기존 라인에 붙이면, 다른 인부가 클라인이라는 커다란 렌치로 돌려 결합시켜야 했다. 렌치는 사람 키 만했고, 무거웠다.



조장이 파이프를 두드려 소리를 내면 한 바퀴를 돌리고, 다시 두드리면 또 한 바퀴를 돌리는 식이었다. 숲을 지나는 곳에서는 도랑을 파고 연결된 파이프라인을 묻었다. 습지 같은 경우는 파이프라인을 콘크리트로 둘러쌌다. 이런 작업을 하루 종일, 몇 주 동한 해야 했다. “The National Transit Co., Standard Oil’s Great Pipeline Company”의 저자 닐 매켈위는 군 복무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선로 인부들이 날카로웠고, 거들먹거렸으며, 고집이 셌다. 열심히 일했고, 그만큼 술도 엄청나게 퍼마셨다. 지역 농부들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딸이 있는 농부들은 이들을 피해 딸들을 도시 친척 집으로 보냈다.

또 다른 역사가 P.C. 보일은 이들이 보잘것없는 급료를 받으면서 거의 정신력으로 그 엄청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고 말한다.

선로 인부들은 파이프라인을 조립해 땅에 묻어 기름을 채운 다음, 누출되는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지저분한 개떼만큼이나 많은 독사와 방울뱀에 물리지 않기 위해 긴 가죽 코트와 가죽 장화를 신은 채 새는 곳을 찾아 나섰다.

새는 곳이 발견되면, 파이프라인과 나란히 설치한 전신선을 통해 사무실에 알렸다. 그러면 사무실에서 보낸 인부들이 땅을 파내고 새는 부분을 고쳤다. 선로 인부들은 마치 은둔자처럼 파이프라인 주변에 세운 창고에 머물렀다. 봄이 되면, 강을 가로지르는 파이프라인 중 상당 부분이 홍수와 유빙 때문에 유실되곤 했다.

선로 인부들은 차가운 물속에서 파이프를 고쳐야 했기 때문에 더 많은 물자와 인부를 보내달라고 전보를 쳤다. 그들은 강변에 묶어둔 배를 통해 강을 오갔다. 코트 주머니에 소고기, 해시 및 수프 통조림을 넣고 다녔다.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 다녔지만, 일자리는 안정적이지 못했다. 하자가 발견되면, 유출된 기름만큼 비용을 치러야 했다.



선로 인부들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황동 공구를 가지고 다니면서 스파크가 생기지 않도록 통행로를 항상 깨끗이 유지하는 인부들도 있었다. 검수를 맡은 인부들은 눈금을 새긴 막대를 들고 다니면서 중간중간 있는 탱크의 원유량을 재서 기록했다. 원유에 섞인 물의 양과 원유의 온도도 확인하면서, 필요한 경우 수치를 조정했다.

원유 탱크에 번개가 내리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불을 끄는데도 많은 시간을 썼다. 도구라곤 젖은 양탄자나 잔디 밖에 없었다. 불이 꺼지지 않으면, 탱크의 바닥을 겨냥해 대포를 날렸다. 원유를 다 빼내고 수리하는 편이 훨씬 더 쉬웠기 때문이다.

1, 2마일마다 설치된 펌프장에서는 또 다른 인부들이 파이프라인으로 원유가 잘 흐르도록 하는데 필요한 작업을 했다. 펌프에 동력을 제공하는 50마력짜리 우드버리 & 부스 보일러에 석탄을 퍼 넣는 인부들도 있었다. 그 외에 항상 보일러에 물이 가득 차게 만들어 일정한 압력을 유지시켜야 했다.

“롱 존(Long John)” 엔진을 관리하고 수리하는 인부들도 있었다. 이곳은 유압식 기술을 잘 아는 전문가가 감독했다. 전보 기사들은 주요 파이프라인 사무소의 감독들과 전보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해서 각 지역의 정보를 모아들였다. 오일 시티의 여러 유정을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들을 필요가 더 이상 없어졌다. 파이프라인 사무실을 방문해 기다리다가, 들어오는 전보를 읽으면 됐다.

펜실베이니아 오일은 경질에(파이프를 막히게 하는 왁스질이 적음) 순수했기(파이프를 부식시키는 황 함량이 적음) 때문에, 초기 파이프라인 운영에는 큰 문제는 없었다. 적어도 유지 보수 측면에서 그랬다. 필요한 경우, 캔버스 천으로 만든 걸레를 집어넣어 파이프라인을 청소했다.



의도는 좋았지만, 청소가 제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1870년대가 되자, 파이프라인 청소도구(원형의 롤러)가 고안되었다. 초기에는 가죽으로 만든 컵 모양이 이었고, 1930년대 고무로 소재가 바뀌었다. 선로 인부들은 이 파이프라인 청소도구를 ‘피그’라고 불렀다. 이전에는 ‘고-데빌(go-devil)’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말의 기원은 초기 원유 업계의 다른 장치와 관련이 있다. 당시에는 원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유정 바닥에 폭발물을 폭발시키곤 했다. 폭발물로는 “어뢰(torpedo)”라는 통에 담긴 니트로글리세린이 사용되었다. 1866년 이 방법으로 특허를 휙득한 E.A.L. 로버츠 대령은 원유가 나오지 않은 유정 바닥을 니트로글리세린으로 뚫어 하루 20배럴을 생산했다.

폭발을 한 번 더 시켰더니, 생산량이 4배로 늘었다. 더 많은 폭발시킬수록 더 많은 양이 생산된 것이다. 따라서 처음 1피트 길이의 가는 주석 용기에 단 4쿼트의 니트로글리세린을 넣었던 것에서 10피트 길이에 200쿼트 이상을 담아 폭발시켰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숙련된 마부가 모는 특수 마차로 유정에 배달되었다. 그러던 중 몇 인치 높이의 둔덕을 건너던 니트로글리세린 마차가 폭발로 사라지는 사고가 터졌다. 이후 한 작가는 그 마차를 몰던 마부가 담뱃갑에 들어갈 크기로 갈기갈기 찢겼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임무는 유정에 니트로글리세린 용기를 넣어 터뜨리는 일이었다. 일단 용기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채운 다음, 유정 바닥까지 내려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잘못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바로 폭발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용기가 ‘고-데빌’이었다.

폭발이 일어나면, 유전 지역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 진동이 일어났고, 펜실베이니아의 브래드포드에서 뉴욕의 카타라우구스 카운티까지의 거리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고-데빌이었다. 용기를 떨어뜨리면 악마처럼 가버린다는 말이다.

현대의 파이프라인도 초기 펜실베이니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이 강철로 된 파이프를 용접해 연결하며, 중간중간에 펌프장과 저장 탱크가 있다. 수십 곳의 업체가 파이프라인 청소용 피그를 만들고 있으며, 파이프를 깨끗이 긁어내는 것이 아니라, (초음파 또는 자속을 이용해) 파이프 내부의 부식 손상을 검사하고 있다.

현대의 파이프라인 운영 업체들은 전산화된 시스템을 통해 원유의 유속과 파이프의 압력을 모니터하고 있지만, 사람과 기계가 함께하는 일이기 때문에 허친슨을 괴롭혔던 것과 비슷한 누출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선로 인부들이 할 역할이 남아있고, 일부는 차량으로 움직이지만, 대부분 아직도 걸어서, 아니면 말을 타고 이동한다.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사람과 운영하는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뿐이다.



자료 출처: Nnautilus, “How the Oil Pipeline Be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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