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바보 같은 실수에 대한 이야기다.
1922년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스위스 로잔의 한 신문사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낮에는 기사를 썼고, 밤에는 가장 좋아했던 일인 소설을 써나갔다. 23살 때였다. 하지만 출판사의 문턱을 넘은 소설은 한 권도 없었다. 그와 당시 아내 ‘엘리자베스 해들리 리처드슨’은 파리에 살고 있었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같은 많은 다른 미국에 추방된 예술가들처럼 뭔가 크게 한 건 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헤밍웨이는 아내에게 크리스마스를 스위스에서 함께 하자고 부탁했다. 아내는 당시 병을 앓고 있었고, 아픈 사람이 그렇듯 몽롱한 상태에서 필요한 물건을 잊고, 쓸데없는 것들은 주워 담아 짐을 꾸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소중한 게 무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도 담았다. 온갖 원고와 초안들, 구상 중인 메모, 심지어 복사본까지 전부 한 가방에 담았다. 단 하나의 가방에.
리옹 역에 도착하자 짐꾼이 그녀의 가방을 객실로 옮겼다. 이어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 아직 몸이 여의치 않았던, 그리고 앞으로 8시간의 여행을 앞두고 있던 그녀는 여행 동안 마실 물을 사러 역사 안으로 황급히 달려나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하나 가방, 그때까지 헤밍웨이가 써놓은 모든 것이 담겨있던 그 가방이 사라지고 없었다.
기차에서 내리면서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그 얘기를 전할 때만 해도 헤밍웨이는 믿기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로잔에 남겨둔 채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해서야 모든 것이 실감되었다.
이 전설 같은 헤밍웨이의 이야기는 최근 작가 ‘쉐인 패리쉬’의 파르남 스트리트 블로그에서 다시 한 번 언급되었다. 패리쉬는 주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현명한(그리고 어리석은) 결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글을 쓴다. 그에 따르면, 지능 하나만으로는 어리석은 결정을 막는데 역부족이다. 스트레스와 피로 같은 요인들 의사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머리가 좋은 사람들도 예상 밖의 일을 저지르곤 한다.
예를 들면, 매년 아이들이 뜨거운 차 안에서 세상을 떠나고 있다. 부모들이 잊고 차에 남겨둔 채 내렸기 때문이다. 일이 벌어진 후 그 부모들이 느꼈을 회한과 죄책감은 형언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기라면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하지만, 신경 과학에서는 뇌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비극적인 위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스트레스나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일반적인 해마 및 전두엽 피질의 역할인 정교한 추론을 방해할 수 있다. 갑자기 휴대전화에 설정해 놓은 알람이 울리면, 부모의 신경 조직은 혼란이 빠질 수 있고, 그대로 차를 일터로 몰고 가는 수가 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내려주고 가는 걸 까먹은 채로 말이다. 우리의 뇌가 이런 정도의 오류에 빠질 수도 있는데, 잃어버린 가방쯤이야 별 대수롭게 보이지 않는다.
실제 헤밍웨이의 아내 리처드슨의 실수는 이미 기차역으로 떠나기 전에 저질러진 것이었다. 그녀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서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팠다. 이 중 어느 한 가지 만으로도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크게 높아질 수 있다. 하물며 이 모든 게 합해졌으니, 판단 착오에 빠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곤 난 후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져보는 와중에 패리쉬의 글을 발견했다.
어제저녁, 하드 디스크를 정리하면서 바탕화면의 폴더 하나를 휴지통으로 드래그해 옮겼고, 그리고 휴지통을 비웠다. 필요 없는 오래된 파일이 들어있는 폴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분이 채 안 돼 그게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고통스럽게 써 내려간 초안을 삭제했던 것이었다. 최근 회의에서 3일간 메모한 내용이 날아간 것이었다. 몇 시간 동안 디스크 검사하고 복구하려 노력하면서, 지인들의 도움을 얻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전부 사라져 버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컴퓨터 앞에 앉을 때부터 이미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어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늦은 밤에 비행기에 올라 잠을 잘 자지 못한 데다가, 집에 와서는 시차 적응이 잘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아프진 않았지만, 아들 녀석이 아팠고, 쉬는 날 온종일을 그 녀석을 돌보면서 보냈다. 출근해서도 그 녀석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저녁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그날 일을 마치기까지 약 한 시간이 걸렸다. 분명 내 실수는 바보 같았다. 하지만 비극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솔직히 말해, 어쨌든 헤밍웨이 수준의 원고는 아니었느니 말이다.
실수도 가치 있을 수가 있다. 헤밍웨이는 잃어버린 원고를 다시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이전 글에서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 떠오르지 않자, 글 쓰는 방법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더 짧고, 더 간결하며, 더 의미가 분명한 단어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리처드슨의 실수는 그를 작가로 만들었고, 그녀와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만, 헤밍웨이의 목소리는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자료 출처: Quartz, “What the most famous lost suitcase in literary history reveals about mista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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