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철의 역사 (5) - 전쟁의 금속, 평화의 금속

강철의 역사 (1) - 강철이 탄생하기까지의 여정
https://steemit.com/kr/@pius.pius/3eptos-1

강철의 역사 (2) - 철과 석탄
https://steemit.com/kr/@pius.pius/g59qe-2

강철의 역사 (3) - 베세머 전로의 탄생
https://steemit.com/kr/@pius.pius/6jx5k-3

강철의 역사 (4) - 철강왕 카네기
https://steemit.com/kr/@pius.pius/7khvuw-4


……….

찰스 슈왑은 견해 차이로 US 스틸을 떠나, 급성장 중이던 베들레헴 스틸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1914년 세계 대전이 2달째 접어들던 당시, 슈왑은 영국 육군성으로부터 비밀 메시지를 받았다. 몇 시간 후, 그는 가명으로 대서양을 건너기 위한 표를 샀다.

유럽으로 건너온 슈왑은 영국 육군성 장관을 만나 엄청난 제의를 받고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영국은 베들레헴을 통해 4천만 달러 상당의 무기를 공급받길 원했다. 적국들과는 거래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슈왑은 이 제안을 수락했고, 이어 또 한 사람을 만났다.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이었다. 이 자리에서 처칠은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독일 유보트와 대적할 수 있는 잠수함을 원했던 것이다. 그것도 즉시.



<플로팅 도크에 있는 영국 E급 잠수함 HMS E34. 1917년 3월 취역한 이후, 1918년 5월 10일 북해 하리치에서 유보트 UB-16을 가라 앉혔고, 1918년 7월 20일 프리지아 제도 부근에서 기뢰에 침몰되었다. 승무원들 모두가 실종되었다.>

하지만 슈왑은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미국의 중립법 상 미국 기업은 1차 세계대전 양 당사국 어느 곳에도 무기를 판매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베들레헴 스틸은 이를 피해 부속을 몬트리올 조립 공장으로 보내 잠수함을 건조했다. 표면적으론 인도주의적 재건 활동이었다. 그리고 미국산 강철이 연합국에 전쟁 물자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1917년 4월, 미국이 공식적으로 1차 세계대전 참전에 선언하자 중립법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1914년,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미국의 제강 능력은 2,350만 톤으로 14년 전 1,450만 톤 보다 두 배 이상이었다. 1918년 종전이 이뤄졌을 때, 이 제강 능력은 다시 두 배가 되었다. 연합국에게 미국산 강철은 동맹국과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로 작용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철강 산업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뉴욕과 시카고의 스카이 라인에 아르 데코 타워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여기에 사용된 강철 대부분은 US 스틸과 베들레헴 스틸에서 생산되었다. 록펠러 센터,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 조지 워싱턴 브리지 및 골든 게이트 브리지 같은 상징적 구조물은 베들레헴의 강철로 지어졌다.

1930년 베들레헴의 강철은 당시 세계 최고층 건물인 크라이슬러 빌딩에도 들어갔다. 1 년이 채 되지도 않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기록을 깼다. 이 빌딩에는 6만 톤 가량의 US 스틸에서 만든 강철이 들어갔고, 크라이슬러를 재치고 멘해튼의 영원한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1930년 크라이슬러="" 빌딩을="" 배경으로="" 건설="" 중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하지만 철강 생산 폭발로 일어난 혁신에는 마천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소재는 자동차, 가전 제품 및 식료품 캔의 생산에도 한 몫했다. (두 곳의 전도유망한 기업 돌과 캠벨은 통조림 식품의 유통 기한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베들레헴 스틸과 US 스틸의 자산 가치는 포드와 제너럴 모터스보다 높아졌다.

정말로 강철의 시대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929년 주식 시장 붕괴에 이어, 경제도 대공황을 겪으면서 철강 생산이 둔화되었다. 미국 철강 노동자들의 구조조정이 계속되었지만, 공장이 완전히 문을 닫지는 않았다. 철로가 여전히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고, 통조림 식품도 인기를 얻었으며, 새로운 강철 제품이 등장했다. 고 금주의 금지로 새로운 철강 제품이 나왔다. 1930년대 팝스트는 블루리본 강철 캔 맥주를 내놓았다.



<1940년대 초="" 팝스트에서="" 생산한="" 블루리본="" 강철캔="" 맥주="">

대공황에 뒤이어, 강철에 굶주렸던 세계는 다시 용광로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독일은 덴마크, 노르웨이 및 프랑스 영토 일부를 점령해, 새로운 철광산 및 제철소를 장악했다. 이익고 나치 정권은 미국 만큼 강철을 생산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동방의 경우, 일본이 만주의 철광석과 석탄 광산을 장악하고 있었다.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빠지자, 미국 정부는 강철 소비재 생산을 상당부분 금지했다. 세계 주요 산업화 국가들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선박, 탱크, 총기 및 비행기 같이 몇 가지 용도로 제한해 강철을 배분하기 시작했다.

미국내 제철소에서는 하루 24시간 동안 금속을 녹였으며, 주로 여성 노동력이 사용되었다. 경제는 다시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곧 미국의 철강 생산량이 다른 어떤 국가들 보다 3배 이상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은 1차 세계대전과 비교해 25배나 많은 강철을 제조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미국산 강철이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고, 미국은 철강 소비재 생산 금지 조치를 해제했다. 전 세계 철강 생산량 중 절반이 미국산이었고, 자동차, 가전 제품, 장난감 및 건축용 철근 시장이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을 누렸다. 남은 선박과 탱크를 분해해 얻은 강철은 다시 용광로에서 녹여, 다리과 맥주 캔을 만드는데 재사용 되었다.

하지만 세계 각국에서 사회 재건과 새로운 제강 기술의 도입이 절실한 상황이 되자, 해외 철강 기업들이 번성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계속…..)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연재] 강철의 역사 (5) - 전쟁의 금속, 평화의 금속’

Your browser is out-of-date!

Update your browser to view this website correctly. Update my browser n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