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그레이엄과 행동주의 투자

오늘날 대부분은 벤저민 그레이엄을 워런 버핏의 투자 스승이자, 투자의 고전 ‘증권분석’과 ‘현명한 투자자’를 남긴 가치 투자의 아버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레이엄이 가치 투자자였던 동시에 행동주의 투자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레이엄은 1934년 증권분석을 내놓기 이전에도 잡지 등에 주주 권리에 관한 글을 기고해 왔습니다. 1932년 포브스 지에 기고한 기업들이 주주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글이나, 부자 기업들은 주주들의 돈을 되돌려 주지 않고 있다는 글이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주주 행동주의에 대한 그레이엄의 글은 오늘날에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최근 더 크게 불고 있는 행동주의 투자자들과 유명 상장 기업들 간의 싸움을 보고 있자면 더 그렇습니다. 데이비드 아인혼의 그린라이트 캐피털이 애플을 압박해, 더 많은 현금을 주주들에게 되돌려 주게 한 일, 칼 아이칸과 델의 싸움, 그리고 이전 글에서 소개한 폴 싱어와 엘리엇의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스탠더드 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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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과 델 21세기 유명 대기업이라면, 20세기 초반에는 존 D.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 이었습니다.

그레이엄은 투자 기회를 찾기 위해 스탠더드 오일과 관련 기업들을 분석했습니다. 록펠러는 역사상 가장 부자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에 가장 주목받던 기업인이었습니다. 자선사업을 펼치기도 했지만, 공격적인 경영 전략을 꾀하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독점금지법을 통해 스탠더드 오일을 34개 기업으로 분할시켰고, 록펠러의 독점적 지위를 박탈합니다. 분할된 기업 중 하나가 바로 ‘노던 파이프라인’입니다. 원유를 스탠더드 오일의 정유공장으로 운송하는 8개 기업 중 하나였습니다.



1926년 정부 통상 위원회는 이들 파이프라인 기업에게 과거 실적을 제출하라고 요구합니다. 노던 파이프라인의 다소 엉성했던 재무 보고서를 검토한 그레이엄은 대차대조표를 요약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윽고 그레이엄은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통상 위원회 자료실에서 이 기업의 파일 전체를 조사합니다. 이 여행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레이엄은, 노던 파이프라인이 주주들 모르게 주당 95달러에 달하는 철도 채권과 다른 유동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한편, 노던 파이프라인의 주식은 주 당 65달러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 후 그레이엄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내가 거기 있었고, 용감한 코르테즈-발보아처럼, 예리한 눈으로 새로운 태평양을 발견했다. 지금도 왜 증권 업계 누구도 통상 위원회의 자료를 살펴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의아스럽다.

스탠더드 오일의 이전 계열사 주식 내부에 숨겨진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1926년 나머지 기간, 노던 파이프라인의 지분을 거의 5%나 모아들었습니다.

그레이엄의 시작은 겸손하고 단순했습니다. 노던 파이프라인의 경영진에게 창고에 쌓아놓은 현금을 풀라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경영진은 그의 설득을 무시했습니다. 실제, 노던 파이프라인의 연간 영업이익은 30만 달러에 불과했던 반면, 정상적인 사업 흐름과 관계는 철도 채권을 360만 달러나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초과 유동 자산이 주당 95달러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레이엄은 그중 주당 90달러를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분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기업의 합법적인 주인으로서 그레이엄의 주장이 이치에 맞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진은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그레이엄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주주 행동주의를 낳게 된 것입니다.

의결권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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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은 노던 파이프라인의 1927년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에게 직접 자기주장을 전달했습니다. 경영진은 그레이엄이 다른 주주의 제청을 받지 못했다는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그의 주장을 기각했습니다. 그렇다고 꺾일 그레이엄이 아니었습니다.

이윽고 1928년 노던 파이프라인의 주주총회. 그레이엄은 다른 주주들을 설득해 40% 상당의 의결권을 확보했습니다. 경영진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레이엄의 이사 선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 유보 중이던 유동 자산에서 주당 70달러를 주주들에게 분배했습니다. 그레이엄은 2대 주주가 되었습니다. 최대 주주는 다름 아닌 존 D. 록펠러가 지배하는 록펠러 재단이었습니다.



이후 그레이엄은 록펠러가 자신의 행동주의를 눈감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레이엄의 성공에 영감을 받아 행동주의 투자 방식을 적극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레이엄과는 우연히 세 번 만난 게 전부였던 록펠러는 노던 파이프라인의 사례를 바탕으로, 장부상 초과 유동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다른 이전 스탠더드 오일 자회사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스탠더드 오일은 수십 개의 기업으로 쪼개졌지만, 록펠러 재단은 여전히 분할된 이들 기업의 지분을 상당량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 또한 자신의 비영리 조직을 확장하는 데 이런 주주 분배권을 즉시적으로 사용하길 원했습니다. 이들 기업은 내심 못마땅했지만,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록펠러가 여러 기업들로부터 초과 유동 자산을 분배 받게 되었고, 그 바탕에 “노던 파이프라인 사건”으로 알려진 그레이엄의 승리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증권 분석가로서 또 행동주의 투자자로서 그레이엄의 명성은 날로 커갔습니다. 1932년 그레이엄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주주들이 자신이 기업의 소유주일 뿐만 아니라, 주가를 결정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참고 자료: “The Einstein of Money: The Life and Timeless Financial Wisdom of Benjamin Gra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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