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홀(Andy Hall)은 당대 가장 성공한 원유 트레이더가 분명하다. 그는 거의 45년 동안 원유 트레이더로 일했고, 시장의 여러 차례 역사상 가장 큰 유가 변동 상황에서 바른 편에 섬으로써 큰 부를 일군 동시에 훌륭한 평판을 얻었다. 또한 현대 원유 트레이딩 산업을 만드는 데도 일익을 담당했다. 언론과의 인터뷰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금융 위기 동안 씨티 그룹에서 1억 달러의 보너스를 놓고 싸웠던 일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홀은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언론과의 인터뷰를 오만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파이낸셜 타임스나 월스트리트 저널 1면에 실린 인물들은 대게 최고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언론과의 인터뷰를 피해왔던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1970년대 옥스퍼드 대학 시절의 홀)
이제 헤지 펀드를 폐쇄한 지 2년이 지난 홀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니다. 이번 연례 FT 상품 서밋에 참석한 그는 원유 시장과 과거 가장 컸던 원유 트레이딩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그의 기억에 가장 크게 남아있는 트레이딩 중 하나는 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을 계획할 당시 진행된 것으로, 동료들로부터 “신”이란 별명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홀은 피브로(Phibro)에서 상품 트레이더로 일하고 있었다. 유가는 하락했고 OPEC 회원국들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홀은 낮은 가격을 활용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니지만, 당시에는 흔치 않은 트레이딩 방식이었다. 즉, 낮은 가격에 원유를 매입해 유조선에 보관하고 있다가, 추후 유가가 상승하면 선물 시장에 인도하는 방식이었다.
홀은 피브로에서 일할 당시의 그 전략을 이렇게 설명한다.”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방식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마 우리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유조선을 빌렸을 겁니다.”
(앤디 홀의 원유 트레이딩 성공 사례)
그리고 이것은 그가 사용한 전략의 전부였다. “나는 우리에게 유조선이 몇 척이나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존 굿프렌드(당시 피므로의 모기업이던 살로몬의 CEO)가 전화를 걸어와 ‘이봐 앤디, 자네 팀이 평소에는 절대 운영 자금을 쓰지 않더니만, 이번 달에는 몇 억 달러나 운전 자금을 썼다는 소식을 들었네.’라고 말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싼 가격에 엄청난 원유를 매입한 홀은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할 가능성이 컸음을 깨달았고, 일생일대의 기회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거래에 헤지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유가 변동성에 완전히 노출시켰다. 그의 생각이 어긋나게 되면 손실은 천문학적이 될 태세였다.
하지만 그의 예상이 적중했다. 홀은 그의 눈앞에 나타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리고 이어서 후세인이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그날 밤을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새벽 한 시에 도쿄 사무실과 싱가포르 사무실에서 이라크의 탱크가 쿠웨이트의 도시에 나타났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원유 시장은 어떻게 됐어?” “뉴욕 종가 보다 비드가 배럴 당 6달러 올랐습니다.” “오퍼는?” “오퍼는 없습니다.””
(홀과 아내)
다음 날 뉴욕에서 유가는 10%나 급등했다. 이후 몇 달 만에 두 배로 뛰었다. 유가 하락세로 돌아설 무렵, 피브로와 홀은 이미 트레이딩을 모두 마무리했다.
15년이 지난 후, 홀이 일하던 피브로는, 현재는 다시 시티그룹에 들어갔지만, 독립 기관이 되었다. 홀은 세기의 전환기였던 당시 다시 한 번 큰 내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중국 경제와 14억의 소비자를 기회로 보았다. 충족되어야 할 새로운 수요가 나타날 것으로 본 것이다. 홀은 유가가 상승할 것으로 믿었고, 수억 달러를 퍼부어 만기가 긴 원유 선물 계약을 매수했다.
이 트레이딩 역시 만루 홈런이었다. 유가는 2003년부터 2008년 여름까지 25 달러에서 최고 147달러까지 상승했다. 홀은 거의 고점인 140달러 부근에서 모든 선물 계약을 현금화했다. 이제 막 금융 위기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는 “진입 시점도 잘 잡아야 하지만, 또한 청산 시점을 잡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라고 말한다.
이후 씨티 그룹이 정부로부터 450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아야 했지만, 홀은 계속 승승장구했다. 그는 2009년 초반 유가가 30달러 선에 있을 때 다시 시장에 진입했고, 80달러로 반등했을 때 청산했다. 하지만 금융 위기로 어수선한 환경에서 성공 보수로 받게 되어있던 1억 달러의 보너스가 역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시티그룹의 상품 트레이딩 수익 추세)
홀은 보너스를 포기하지 않았고, 시티그룹으로부터 1억 달러를 받아내기 위해 싸웠다:
시티그룹의 문제는 나와 계약서를 썼고, 계약을 깰만한 분명한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켄 페인버그도 이 사실을 알만큼 충분히 똑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에 대한 일종의 멋진 해결책이란 걸 생각해 낸 모양이었습니다. ‘좋아요 미스터 홀, 계약 상에 권리가 있으므로 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씨티그룹에서는 나가야 할 겁니다.’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편에 속하지만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벌어다 준 돈을 받아 간 많은 사람들이 나만큼 세금을 냈는지는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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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그룹 측에서는 결국 2010년 피브로를 옥시텐탈 페트롤륨에 매각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그동안 피브로에서 홀이 누렸던 자유재량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홀은 “솔직히, 20년 이상 자유롭게 트레이딩에 나서던 데서, 갑자기 경영진의 전화를 받아야 하니 죽을 것 같았습니다.”라고 회상한다. 홀은 블랙스톤의 헤지 펀드 아스턴벡 캐피털도 운용 중이었고, 펀드를 40억 달러 규모까지 키웠다.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람에게 다 그러하듯이 홀의 운도 다했다. 홀은 2017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장에 충격을 던졌다. 홀은 원유 트레이딩을 중단했고, 그해 6월까지 30%의 손실을 기록하던 주력 아스턴벡 마스터 코모디티 펀드 II를 폐쇄한 것이다. 홀은 2017년 투자자들에게 세계 원유 시장이 “심각하게 악화됐다.”라고 밝혔고, 펀드의 손실 이유를 OPEC가 원유 시장을 거의 통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시 그런 일을 선택하게 될까요? 아마 그러지 않을 겁니다. 부모님 차고에서 컴퓨터를 만들 겁니다. 아니면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20대 후반부터 미술품 딜러가 되는 것도 좋겠죠. 트레이딩은 때로 아주 스트레스가 많은 일입니다. 하지만 열정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앞만 보고 살고 싶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훨씬 많습니다. 과거 경력에 짓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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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Financial Times, “The Rise And Fall Of “Oil Trading God” Andy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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