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원주민 토토낙(Totonac) 족의 전설에 따르면, 토토노코판 왕국이라는 곳에 아름다운 공주가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공주가 신전에 바칠 꽃을 꺽는 모습을 한 젊은 왕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욕정에 사로잡힌 왕자는 공주를 납치해 숲속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신전 사제들에게 붙잡혔고, 둘 모두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몇 달 흘렀다. 둘이 죽은 자리에 녹색의 여린 순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며칠 후 허리 높이로 자랐다. 이윽고 깍지 열매가 열렸다. 깍지를 까자, 숲 전체를 덮을 만큼 향기가 퍼져 나왔다. 이렇게 우리에게 바닐라 향기를 가져다준 것은 아름다운 공주의 죽음이었다.
토토노코판 공주의 신화는 바닐라의 기원에 대해 전해 내려온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지만, 토토낙 족 모두는 틀릴소치틀 덩굴의 바닐라 깍지 열매가 하늘이 내려 준 엄청난 선물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감질나는 듯 섬세한 향은 바닐라를 수 세기 동안 길러온 토토낙 족의 자부심이다.
하지만 15세기 경, 이 지역을 정복한 아즈텍인들은 토토낙 족에게 바닐라 열매를 공물로 바치도록 했다. 아즈텍인들은 초코라틀(오늘날 ‘핫 초콜릿’의 전신)을 즐겨 마셨고, 여기에 바닐라를 넣어 먹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즈텍 또한 스페인에 정복되었고, 초코라틀이 스페인에 전해져, 바닐라의 맛이 유럽 전체로 퍼졌다. 엘리자베스 1세 왕실의 약사 휴 모건(Hugh Morgan)은 초콜릿의 첨가제에 불과했던 바닐라를 하나의 향미료로 만들어냈다.
산업적 규모로의 탄생
바닐라가 서양의 미각을 사로잡게 되자, 그 용도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었다. 과자, 빵, 음료, 사탕 및 아이스크림의 레시피 중 하나로 자리 잡으면서 수요 또한 증가했고,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향미료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바닐라가 잘 자라는 곳은 주로 멕시코, 타히티, 서인도 제도 및 마다가스카르같이 폭우, 산림 파괴, 수확 변동이 심각한 열대 지역이다. 또한 바닐라 재배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열매가 맺기 전에 수분 작업을 해야 하고, 익는 속도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매일 익은 깍지를 따야 하는 노동집약적인 일이다. 이런 요인들이 합해져 바닐라 생산에는 높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자연산 바닐라는 사프란을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향미료가 되었다.
바닐라 생산이 비용이 많이 들자, 이를 대체할 것이 필요했다. 1858년 프랑스의 약사 니콜라스-시어도어 고블리(Nicolas-Theodore Gobley)는 바닐라 추출물에서 순수 바닐린 결정인 바닐린을 분리해 냈고, 이후 중요한 향미료 화합물로 쓰이게 되었다. 이후 독일 화학자 페르디난드 티만(Ferdinand Tiemann)과 빌헬름 하르만(Wilhelm Haarmann)이 바닐린의 화학 구조를 밝혀냈고, 소나무 수액으로 만든 코니페린과과 아이소유제놀의 글루코사이드를 사용해 최초의 합성 바닐린을 만들었다.
이어 바닐린 생산 공장을 만들었지만, 큰돈을 벌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년 후, 티만과 칼 라이머(Karl Reimer)는 나무와 석탄의 열분해 산물로서 훨씬 저렴한 구아야콜을 클로로포름과 반응시킨 다음, 알칼리와 산으로 연속 처리하는 두 번째 바닐린 합성 방법을 개발했다. 라이머-티만 반응으로 반응으로 알려진 이 화학 합성 방법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하르만 & 라이머 컴퍼니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회사가 오늘날 다국적 화학 원료 제조회사인 심라이즈(Symrise)의 전신이다.
새로운 생산 공정을 통해 가격이 저렴해지자, 바닐라는 들불처럼 퍼져나갔고, 바닐라 향이 첨가된 과자, 빵, 사탕 및 음료 등이 대량으로 생산되게 되었다. 이어 바닐라는 아이스크림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에 의해 미국에서도 대중화되었다.
또한 바닐라는 향수 업계에서 베이스 노트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달콤한 향을 증진해주고, 강한 향을 완성해 주는 독특한 기능을 하고 있다. 바닐라는 식품 기업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1886년 코카콜라의 원래 공식에도 바닐라가 들어갔다. 바닐라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관련 기업들의 미래도 탄탄해 보인다.
합성 바닐라의 진화
바닐라 산업이 성장하면서, 새로운 바닐린 합성 방법의 개발 및 비용 절감에 박차가 가해졌다. 정향 오일의 주성분인 유게놀의 구조가 코니페린과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저렴한 가격 때문에 바닐린을 더 경제적으로 합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공정 또한 1920년대 도태되게 되는데, 석유 화학 산업이 급격한 발전하면서, 구아야콜을 초저가로 합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가 되자, 솔베이에 의해 보다 효율적인 바닐린 화학 합성 방법이 개발되었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구아야콜을 글리옥살산과 반응시켜 바닐린만델산을 만들고, 이를 대기 중에서 산화 환원시켜 바닐린을 만드는 방법이다.
또 다른 바닐라 생산 방법은 목재와 목재 가공 부산물로 만들어진 생화학 물질인 리그닌을 사용하는 것이다. 리그닌을 수산화나트륨과 황화물로 산화시키면 바닐린을 쉽게 합성할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합성 과정 중 촉매 산화 공정에서 독성 구리 시약이 사용되기 때문에 식품 용도로는 승인받지 못했다. 이 방법으로 제조된 바닐린은 주로 향수 및 의약품 제조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아야콜 공정의 미세 부산물인 에틸바닐린이 1930년대 이래 사용되어 온 또 하나의 합성 향미료다. 바닐린보다 향미가 강하고, 고온에도 견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닐린 분자에는 1-탄소 메틸 치환체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2-탄소 에틸기로 치환하면, 에틸바닐린이 된다. 향의 강도가 바닐린보다 3~5배 더 강하며, 가격도 더 비싸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고품질 초콜릿 및 제과제빵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에틸바닐린과 바닐린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기 때문에, 혼합을 통해 더 풍부한 바닐라 향을 낼 수 있다.
바닐라의 현재와 미래
현재 연간 바닐린 생산량은 약 18,000톤에 이르며, 이중 85%가 구아야콜 공정으로 생산된 것이며, 15%는 리그닌으로 생산된다. 마다가스카르와 인도네시아가 최대 천연 바닐라 생산국으로, 합해 약 6,000톤을 생산하고 있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크리미한 향이 들어간 가공식품 수요가 증가하면서 식품 시장도 커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바닐라의 수요 또한 계속 늘고 있다. 실제, 바닐라 향은 식품의 향을 만드는데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식품 향료 전문가들 사이에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마다가스카르 바닐라 농장)
소비자들이 천연 재료로 만들어진 제품을 점점 더 선호하면서, 식품 회사들 또한 합성 바닐린 사용에서 벗어나고 있다. 네슬레, 제너럴 밀스, 허쉬 및 켈로그 같은 여러 식품 회사들이 자사 제품 생산에 천연 바닐라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천연 바닐라 생산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높은 가격과 불안정한 공급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식품 향료 전문가들과 식품 회사들은 제품 생산에 바닐린의 양을 줄이면서도, 기존과 비슷한 향을 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생명 공학 회사 에볼바(Evolva)와 징코 바이오웍스(Ginkgo Bioworks)는 다른 각도에서 천연 바닐라 향에 접근하고 있다. 유전자 편집 방법으로 생합성 유전자를 만들고, 이를 효모 세포에 주입해, 저렴한 설탕을 발효시켜 바닐린을 생산하고 있다.
합성된 화학 전구물질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로부터 제조하기 때문에, 이 바닐린은 현재의 규정 하에서 천연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런 생물학적 합성 방법이 천연 바닐린을 지속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게 생산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 변형 생물과 거기서 생산된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두려움이 극복해야 할 과제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닐라”라는 말이 “평범한, 특별할 것 없는”이란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지만, 바닐라는 여러 제국의 몰락, 여러 산업의 부상 그리고 기술 혁명의 드라마의 주 무대가 되었고, 앞으로도 어린 시절의 달콤한 추억과 일상생활의 먹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정말로 바닐라만큼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자료 출처: Bryan Quoc Le, “There’s Nothing ‘Vanilla’ About Van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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