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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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기사에게 주소를 보여주자 놀라는 눈치였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산토도밍고 중에서도 관광객들이 거의 찾지 않는 외떨어진 곳이었기 좁은 거리에는 쓰레기가 지천에 널려있었다. 문을 연 술집 앞 보도에는 문신을 한 청년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몇 개 안 되는 좀 더 큰 건물들에는 먼지가 말라붙어 있었고, 겉으로는 버려진 곳처럼 보였다.
그중 한 건물은 예외였다. 택시가 내려준 3층 건물은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Central del Derecho”라는 법률 사무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2층까지의 계단까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주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2층에 도착하자, 서류를 작성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 작성한 사람들은 사무원에게 서류를 건넸다.
(포르토레알의 사무실 밖 카페와 서류 작업 중인 사무실 내부)
몇 분이 흐르자 누군가 내게 검은 나선형 계단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계단 쪽으로 다가가자, 반자동 소총을 든 경호원들이 막아섰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호원은 웃으면서 문쪽을 가리켰다. 여성 몇이 도미니카 스튜인 산코초를 요리하던 작은 부엌을 지나 큰 사무실로 들어갔다. 건물 나머지보다 약간 더 깔끔했다. 20여 명이 의자와 소파에 앉아 있었고, 모두가 큰 책상 뒤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던 한 남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빈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것 같았다.
바로 포르토레알이었다. 잘 맞는 푸른색 양복 상의와 꽉 끼는 청바지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 65세라고 하기엔 젊어 보였고, 얼굴에 주름도 없었으며, 머리는 짧게 깎은 상태였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무엇보다 방 안에서 그의 존재감은 분명해 보였다.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주목하고 있었고, 그의 농담에 웃었으며, 그가 말할 때는 주의를 기울였고, 그가 흥분하면 같이 화를 냈다. 그들은 그의 법학 학위를 존경하면서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도미니카 변호사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호칭이었다.
3월 말이었다. 페냐 역시 사무실에 있었고, 내가 탔던 뉴욕발 비행기를 같이 타고 도착했다고 했다. 하우스펠드를 검색해 본 후 첫 도미니카 여행이었다. 그는 현재 이전 직장을 그만두고, 두 곳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소득은 전보다 절반으로 줄었다. 그리고 다섯 째 아이도 낳았다. 그는 현재 가족 부양을 제시에 맡겨놓았기 때문에, 부부 관계도 위험해 놓여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얘기한다. 그는 사촌 형과 마찬가지로 구즈만 가문의 오래전 유산을 되찾는데 손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믿음을 잃은 형제자매들은 이런 돈키호테 같은 모험을 하려고 가족을 내팽개쳤냐고 그를 비난한다. 페냐는 자신이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주려고 이러는데 지원은 못할망정 비난으로 대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고 화도 많이 났다.
사무실에 있는 대다수는 로사리오 가문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2011년부터 포르토레알이 이 가문의 변호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는 구즈만 가문의 유산 소식을 듣기 훨씬 전부터 로사리오 가문의 유산 상속 작업을 시작했다. 로사리오 가문의 유산을 되돌려 받는 과정은 경과가 좋은 모습이었지만, 구즈만 가문의 노력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로사리오 가문은 곧 돈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포르토레알이 전화를 끊은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상속 재산을 발견했는지를 물었다. 그는 거의 한 시간 동안 돈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얘기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터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포르토레알의 생각이던 모양이었다.
포르토레알은 페냐의 통역으로 1600년대 히스파니올라(현재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공유 중인 섬)를 스페인이 어떻게 식민지화했는지 얘기했다. 이어서 1649년에 스페인 상류층 호세 마르가리토 델 로사리오와 빅토리아 구즈만이 결혼한 후 히스파니올라로 옮겨온 얘기로 이어졌다. 로사리오 가문과 구즈만 가문의 재산은 이렇게 얽혀 있었다.
얘기는 계속됐다. 결국 그는 로사리오 가문의 얘기를 전부다 말했다. 수 세기 동안 로사리오 가문은 산토도밍고에서 북쪽으로 65마일 떨어진 코투이 마을과 주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농장과 목장으로도 많은 돈을 벌었지만, 이 지역의 진정한 돈은 19세기 하신토 델 로사리오의 소유였다고 알려진 금광에서 나왔다. 하지만 1930년이 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엘 제페(El Jefe)”라는 악명의 라파엘 트루히요(Rafael Trujillo)가 권력을 장악했고, 이후 30년 동안 공포 통치를 시작한 것이다.
이후 만나본 로사리오 가문 사람들은 모두 트루히요 치하에서 가문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고통을 당했는지 말했다. 무장 세력이 그들을 강제로 땅에서 내쫓았고, 저항하는 사람은 죽였다. 일부 로사리오 가문 사람들은 숨는 쪽을 택했다. 토지 문서는 불태워졌고, 가문은 더 이상 감히 공개적으로 상속을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1961년 트루히요가 암살될 무렵, 코투히 마을에 살고 있던 로사리오 가문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축에 속했다. 다른 이들은 미국이나 스페인으로 피신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정부가 광산을 인수했지만, 제대로 관리가 이뤄지지 않은 나머지 폐쇄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2006년 캐나다의 배릭 골드(Barrick Gold Corp.)와 골드코프(Goldcorp Inc.)에 의해 인수되었다. 이들은 37억 달러를 투자해 광산을 근대화하고 확장했으며, 도미니카 역사상 최대의 해외 투자였다. 이들 기업이 사들인 광활한 지역에는 로사리오 가문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토지가 들어있었다. 도미니카 정부는 광산에서 나오는 현금 흐름 중 50%의 지분을 얻기로 합의했고, 2017년 세금과 사용료로 1억 8,100만 달러가 정부 금고로 들어갔다.
(산토도밍고 사무실에서 포르토레알)
배릭이 등장하기 전부터도 일부 로사리오 가문 사람들이 왜 자기들에게 재산을 되찾을 기회를 주지 않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배릭이 금광을 운영하기 시작하자, 근처에 아직 살고 있던 로사리오 가문 사람들이 다시 불만을 표출했다. 배릭은 이 지역을 훼손하고, 지역 주민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배릭 측에서는 이런 주장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때때로 변호사들은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소득은 전혀 없었다. 이어 포르토레알이 로사리오 가문의 변호를 맡았고, 배릭으로부터 토지와 질병(대부분 피부병)에 대한 보상금으로 수십억 달러를 받아주겠노라고 말했다. 그 대가로 30%를 요구했다. 일부는 수수료가 너무 과하다고 느꼈지만, 다수결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2012년 2월 포르토레알은 배릭을 상대로 6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포르토레알은 로사리오 가문 사람들과 가두 행진, 시위 및 농성을 펼치는 한 편, 산토도밍고의 국회 의사당까지 4일 동안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의뢰인들에게 배릭 측과 교섭 중에 있다거나, 법정 소송도 잘 진행되고 있다거나, 타결이 가까워졌다고 알렸다. 배릭 측에서는 이 모든 사실이 이뤄진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포르토레알과 처음 인터뷰에서 그는 “배릭 골드의 보상이 거의 다 됐다.”라고 말했지만, 7년이 지난 후에도 동전 한 푼 돌아온 것이 없었다.
포르토레알은 오래전부터 로사리오 가문의 유산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가문 사람 모두가 어려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 얘기를 거의 신앙처럼 믿고 있는 가문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니들은 “우리가 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부자야.”라는 말을 자식들에게 들려주었다. 포르토레알 역시 이 유산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는 이미 3년 동안에 걸쳐 금광 주변의 토지가 로사리오 가문 소유라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4세대와 5세대 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 문서를 수집해왔다. 교회 기록 보관소, 시청, 도서관 등을 뒤져 가문 사람들 수천 명의 사망 진단서, 결혼 증명서 등을 찾아냈다. 이 문서들은 가문의 유산 조사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서 포르토레알은 유산을 찾기 위해 스페인, 스위스, 유럽 및 기타 지역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 자금을 대기 위해 유산을 찾게 되면 자기 몫의 30%를 준다는 조건으로 소규모 투자자들을 모집했다. 그는 처음으로 그랜드 케이먼 군도에서 7억 달러가 넘는 로사리오 계정을 찾아냈으며, 다른 금융 기관 어디를 찾아봐야 하는지 도움을 줄 은행가도 만났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후 스페인의 산탄데르 은행과 스위스의 크레디트 스위스에서 12개의 계정을 추가로 찾았다고 한다. 대부분은 하신토의 아버지 셀레도니오 델 로사리오의 명의였다. 이후 12개 이상의 계정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로사리오 가문의 유산을 찾고 있던 과정에서 구즈만의 계정을 우연히 마주쳤다고 한다. 양가문의 결혼으로 여러 계좌에서 양쪽 가문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구즈만 명의로만 6개의 계정을 추가로 발견했다. 몇 년 동안 가문 사람들이 계좌를 열어보려고 했지만, 관련성을 입증할 만한 문서가 없기 때문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법원이 계좌를 막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돈을 가져오는데 애를 먹고 있다고 덧붙였다.
마침내 다른 질문을 던질 틈이 생겼다.
“그런데 돈은 전부 얼마나 됩니까?”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며, 두 손바닥을 위로하고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마치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많다는 말을 하는 듯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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