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 아니면 바지선 - 원유 운반 파이프라인의 탄생 (1부)

마차 아니면 바지선 - 원유 운반 파이프라인의 탄생 (1부)

남북대화가 진전되면서, 러시아에서 북한을 경유해 우리나라까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얘기가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오늘날 유전에서 정유소로 또는 항구의 선박으로 원유나 천연가스를 옮기는 방식은 이제 일반화되었습니다. 또한 인접 국가로의 수출도 파이프라인을 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처음 대형 유전이 발견되었을 당시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3부에 걸쳐, “녹(Rust)”의 저자 조나단 월드먼(Jonathan Waldman)의 글 “How the Oil Pipeline Began”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원유 파이프라인이 설치되고, 일반화되기까지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1859년 8월 27일 에드윈 드레이크 대령이 펜실베이니아 티투스빌 땅속 200m 아래에서 원유를 발견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 검녹색의 액체를 저장할 곳도, 옮길 방법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에드윈 드레이크 대령과 당시 원유 채굴 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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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까지만 해도, 그 지역에서는 구덩이나 웅덩이에 고인 소량의 원유를 모아서 사용했을 뿐이었다. 원유 웅덩이에 담요를 담근 다음, 담요를 나무판위에 놓고 짜내서 원유를 모아, 빨래통과 위스키 통에 보관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드레이크 대령은 하루 1,000갤런의 원유를 생산할 수 있었고, 이후 훨씬 더 많은 양이 생산될 터였다. 가장 가까운 철도는 북쪽으로 16마일 거리의 뉴욕에 접경한 코리였다. 도로가 있긴 했지만 목재 운송로로 거의 관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동쪽으로부터 애틀랜틱 앤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Atlantic and Great Western Railroad)가, 피츠버그로부터 앨러게니 벨리 철도(Allegheny Valley Railroad)가 개통되기 전까지, 그렇게 5년 동안 드레이크 대령과 동료들은 생산한 원유를 수만 개의 오크통에 담아, 마차와 바지선에 싫고 정유소로 옮겼다.

(원유 통을 옮기던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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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장화를 신은 마차 인부들 한 번에 1톤가량이 든 원유 통 6개를 마차에 싣고, 남쪽으로 15마일을 달려 오일 시티까지 옮겼다. 여기서 다시 원유 통을 바지선에 싣고 앨러게니 강을 건넜다. 마차 인부들은 팀으로 움직였고, 원유 1통 당 3 내지 4달러의 운송료를 받았다. 당시 원유 1통 가격과 비슷했다.

도로 사정에 따라 운송료가 달라졌다. 수많은 마차 인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당시 하루 동안 2,000대의 마차가 티투스빌 다리를 오갔다. 그들은 거칠었고, 원하는 것도 많았다. 사람들에게 돈만 아는 양아치라고 불렸다.

지역 수로였던 오일 크릭은 충분한 원유를 실어 나르는데 충분치 않았다. 때문에, 마차 인부들의 수요는 사라지지 않았다. 개선이 필요했다. 바지선 인부들은 지류에 둑을 쌓아 수로의 깊게 해 바지선의 적재량을 늘렸다. 가장 작은 바지선은 원유 20통을 실을 수 있었고, 가장 큰 것은 1,000통을 실을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만조 시가 되면, 원유 통이 급류에 떠내려가는 경우가 빈번했다.

2만 배럴의 원유가 남쪽으로 옮겨졌다. 그러면서 바지선이 강기슭이나 다른 바지선과 부딪히면서, 원유 통이 강으로 유실되곤 했다. 만조 시에 보통 원유 1,000여 통이 유실되었지만, 원유를 공짜로 얻는 지역 주민들은 좋아했다. 통에서 유출된 원유가 수로를 덮었고, 엘러게니 강변 둑을 물들였다. 바지선에 무사히 남은 원유는 피츠버그까지 옮겨졌다.

(원유 통을 옮기던 바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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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를 육로로 옮기든, 해로로 옮기든, 통 제조업자들은 아무 신경 안 썼다. 그들은 마차 인부들만큼 바빴기 때문이다. 1870년 드레이크 대령이 양질의 원유를 몇 분마다 한 통씩 생산하게 되자, 오일 시티의 통 제조업자 한 명 당 하루 1,000개의 원유 통을 제작했다. 상점마다 말 몇 마리 높이로 통을 쌓아놓고 있었다. 통 제조업자들은 한 번에 20개씩 통을 가져왔다. 잡역부들보다 42갤런 짜리 통을 제작하는 업자들이 더 많았을 정도였다.

1862년 마침내 철도가 개통되자, 원유는 편평한 화차에 실려 운반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실되는 원유의 양도 크게 줄었다. 42갤러 짜리 통에서 최종 운반된 원유는 40갤런이었다. 1865년이 시작되면서, 원유는 특수 제작된 2,000갤런 짜리 목조 탱크차로 운반되기 시작했다. 운반은 쉬워졌지만, 위험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한 번 화재가 나면 걷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관련 당사자 한 명은 이렇게 회상했다.

철도에서 상해나 사망 사건이 없던 날이 없었다. 대부분이 이 지역을 “죽음의 그림자 계곡”이라고 불렀다.

1869년 목조 탱크가 철재 탱크로 대체되었고, 곧 운반 용량도 두 배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운반할 기름이 너무 많았다. 1,000만 배럴의 원유를 가졌어도, 운반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었다. 이제 원유 산업은 철도보다 더 저렴한 운송 수단을 찾아야 했다.

파이프라인이 안성맞춤이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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