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미국 최초이자 유일했던 한 황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아메리카 인디언 얘기는 아니다.
별의 탄생
조슈아 에이브러햄 노턴(Joshua Abraham Norton)은 영국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에서 자랐다. 처음부터 황제를 꿈꾼 건 결코 아니었다. 1849년 미국에 들어온 건 순전히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에서 돈을 좀 벌고자였다. 어쨌든 금맥을 찾아서는 아니지만 꽤 성공을 거두게 된다. 바로 부동산을 통해서였다. 종잣돈 4만 달러를 단기간에 25만 달러로 불린 것이다.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시내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주인공 노턴은 이제 이 도시의 일원이 되었고, 넉넉한 삶을 즐기면서, 유행을 선도하고 다녔다. 한 마디로 멋진 사나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많은 걸 원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에 나오는 인물 “킹”의 배경 인물이 바로 노턴이었다. 노턴이 황제로 재임하던 시절 트웨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로 일했다.)
얘기는 쌀에서 시작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주민들이 즐겨 먹는 음식 중 하나가 쌀밥이었다. 그리고 쌀은 전적으로 중국 청나라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거기에 흉년까지 겹치자 중국 정부는 쌀 수출 금지령을 내립니다.
이로 인해 185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쌀의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이때가 노턴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계기였다. 그의 머릿속이 번개가 내리치듯 번쩍했고, 하늘이 점지해준 일확천금의 기회임을 느꼈다.
쌀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이쯤에서 이미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말고. 그는 쌀을 매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노턴이 정직한 남자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웃을 속여먹으려는 게 아니라, 이미 큰 부자지만 돈을 좀 더 벌어보려고 욕심을 낸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쌀 값은 파운드당 5센트에서 50센트까지 상승했다.
이때 노턴이 쌀을 풀었다면, 미국에 황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노턴도 마찬가지였다. 값이 더 뛸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일은 그가 계획했던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노턴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페루산 쌀이 들어오자 쌀 값은 그전보다도 더 싼 3센트까지 떨어졌다. 1856년 38세가 된 노턴은 망가졌다.
(황제와 끝까지 함께한 것은 두 마리 떠돌이 개 버머와 라자로였다. 작가 에드워드 점프가 그린 이 카툰을 황제가 보면 모욕을 느꼈을 수도 있다. 존엄한 황제가 개들과 같이 식사를 하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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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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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심각한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종적을 감췄던 몇 년 동안 무얼 하고 다녔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여러 곳을 떠돌다가 꿈속에서 황제가 될 운명이라는 점지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1859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샌프란시스코 불리틴 신문사 사무실로 걸어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노턴, 당신 노턴 맞죠?”라고 말했다.
>맞느니라. 하지만 이젠 너희들이 알던 그 노턴이 아니네. 노턴 1세 폐하라고 부르게. 짐은 미국의 황제이며, 너희들을 구원하려고 돌아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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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역 주민 모두가 신문에 실린 그의 포고문을 읽었을 것이다.
>미국 시민 대다수의 간청에 따라, 남아프리카 희망봉 알고아 만에서 와서 지금까지 9년 10개월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낸 나 조슈아 노턴은 스스로를 이 미국의 황제로 선포하고 선언하노라. 이에 그 권한에 따라 다음 2월 1일까지 연방 소속의 각주의 대표들은 이 도시 뮤지컬 홀에 모일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즉시 이 나라의 모든 해악을 근절할 수 있도록 기존 연방 법률을 개정해, 국내외에서 우리의 신뢰와 존엄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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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를 연결하는 다리 건설을 처음 제안한 것도 황제였다.)
황제 기념품 판매
지금 샌프란시스코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누구도 황제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실제, 황제의 뜻을 잘 받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쩌면 따듯한 정감을 느껴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그를 보면 인사를 했고, 시는 황제를 직업 목록에 올렸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다면, 구리 단추 군복의 황제 사진, 황제 인형 또는 50센트 짜리 황실 국채를 사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개막일에 극장을 찾으면, 황제의 전용 칸을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도시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황제와 마주쳤을 수도 있다.
황제는 계산서를 지불하지 않았다. 많은 레스토랑에서 황실 봉인이 찍힌 허가서를 내면 공짜로 식사를 대접했다. 이 허가서가 바로 곧 황제의 돈이었기 때문이다.
(노턴 1세 황실 정부가 발행한 10달러짜리 지폐)
황제는 어디든 마음대로 다녔다. 교회, 지역 행사, 건설 현장 등 어디서나 대중의 눈에 띄었다. 이윽고 황제는 모든 곳의 신민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정했고, 자기 호칭에 멕시코의 보호자라는 직함을 더 얹었다. 행동은 이상했지만, 사람들은 황제가 대화를 즐기고 또 꽤 조리 있게 말도 잘한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여러 시사 문제를 잘 꾀고 있었으며,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도 박학다식했다.
노턴은 20년간 재위하면서, 나라의 파멸을 막기 위해 많은 정치 개혁을 요구하기도 했다. 주요한 골자는 의회를 폐지하고, 양당제를 혁파하는 것이었다. 또한 황제는 소수 민족에 대한 공정하고 윤리적인 대우를 구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심지어 여성의 참정권을 지지하기도 했다. 무릇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에게는 확실히 생각이 많은 법이다.
황제 폐하 붕어
어쩌면 노턴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희생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인기를 사회에 퍼뜨릴 줄 아는 영업의 천재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실제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고, 1880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황제의 붕어를 함께 슬퍼했던 것은 사실이다. 황제는 거의 3만 명의 존경을 받았다. 기업가 협회인 퍼시픽 클럽이 황제의 관을 마련했고, 샌프란시스코 시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는 떠났지만, 황제는 잊히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1월 8일을 기념일로 지정한 곳도 여럿이며, 신흥 종교 디스코디언(Discordian)에서는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조슈아 에이브러햄 노턴의 유산”을 지켜나가는 목적의 모임 “Emperor’s Bridge Campaign”도 있다. 세상을 떠난 지 138년이 지났지만, 미국 최초의 그리고 유일했던 황제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살아있다.
자료 출처: Nicol Valentin, “The Happy Years of America’s First (and Only) Empe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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