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주식 시장 붕괴 30주년 -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1987년 가을로 시간 여행으로 떠나보자. 어깨에 잔뜩 뽕이 들어가 있었고, 장발의 헤어스타일이 유행이었고,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몇 달 동안 고든 게코가 ‘탐욕은 좋은 것’이라 떠벌리는 말은 차치하고라도 과잉의 10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다음 달이면 1987년 10월 19일 월요일에 발생해 5년 동안의 강세장을 끝낸 주식 시장 붕괴 30주년이 된다. 그날 다우존스 산업 평균 지수는 508포인트(22.6%) 하락했으며, S&P 500 지수 또한 20.5% 하락했다. 이것은 월스트리트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간 최대의 하락폭이었고, 일간 하락률로도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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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날의 폭락은 홍콩 항셍 지수가 420.8포인트(11.1%) 하락하면서 아시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태는 도쿄, 시드니, 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 파리 시장이 속속 개장하면서 들불처럼 번져갔다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런던 시장이 폭락 대열에 합류하면서, 영국 FTSE 지수도 10.8% 하락했다. 미국 시장은 급격에 이어, 1987년 10월 20일 일시적 반등을 겪었지만, 아시아와 유럽의 시장이 실제로 최대의 하락폭을 기록했다.

이 “블랙 먼데이”의 원인은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지만, 며칠 동안에 걸쳐 주식 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도를 극적으로 그리고 급격하게 떨어뜨린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1987년 되돌아보기

1987년의 시장 붕괴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번째 요소는 검증되지 않은 전산 시스템에 의해 자동 매매가 가능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새롭고 복잡한 투자 수단의 개발이었다. 당시 파생 상품(지수 옵션과 선물)이 섹시한 새로운 금융 상품이었으며, 펀드 매니저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시장이 움직임에 따라 파생 상품을 자동으로 거래했다. 10월 19일 이런 프로그램들은 대량의 매도 주문 냈고, 이는 공황 상태를 조성하고, 많은 주식의 유동성을 증발시켜버렸다.

1987년의 시장 붕괴의 서곡이었던 이전 몇 주 동안 여러 가지 경제적 요소가 작용했다. 우선, 유가가 급등하면서 그해 1분기부터 인플레이션이 빠르게 가속화되었다. 1987년 7월 WTI 유가는 배럴당 22달러로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18개월 만에 가장 높은 가격을 보였으며, 1년 전에 비해 거의 두 배가 되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시장 참여자들에게 1979년의 에너지 위기는 멀지 않은 과거의 기억이었기 때문에, 유가의 배가는 중요한 관심사였음을 집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전년 대비 CPI 상승률은 1987년 1월 1.4%에서 1987년 9월 4.3%로 커졌다. 이는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운송비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이외의 또 다른 인플레이션 요인은 미국 달러 가치의 하락이었고, 그에 따른 수입 상품 가격의 상승이었다. 달러 약세는 1980-1985년 사이 보인 달러 강세에 대응한 1985년 플라자 합의로 계획된 세계 중앙은행들 개입 결과였다. 합의의 결과, 이후 2년 동안 달러의 가치는 급격하게 하락했다.

1987년 2월의 루브르 합의는 달러 약세를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합의는 1985년 합의보다 효과가 훨씬 더 적었으며, 참가자들의 공개적 대립은 시장에 신뢰도를 불어 넣지 못했다. 1985년 2월에서 1987년 10월 사이 달러의 가치는 영국 파운드화 대비 38%, 일본 엔화 대비 47%나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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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 상승과 미국 달러 약세에 대한 우려는 달러 표시 자산의 매력을 떨어뜨렸고, 금리를 밀어 올렸다.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1987년 초 7.2%에서 10월 중순 10%까지 상승했다. 동시에, 미국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는 긴축 통화 정책을 펼쳤다. 연방 기금 금리는 5와 7/8에서 7과 1/4로 137.5 베이시스포인트 상승했다. 이 기간 동안 연준의 리더십이 바뀌었다. 1987년 8월 11일까지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역임한 폴 볼커에 이어 앨런 그린스펀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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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전반기에는 달러 강세로 미국의 무역 적자가 급증했다. 1980년대 중반이 되자, 월간 무역 수지가 가장 주목받는 경제 지표 중 하나가 되었다. 이론적으로, 달러 약세는 수입 물품의 가격은 비싸게 만들고, 수출 가격은 떨어뜨리기 때문에 무역 적자 축소에 도움이 될 것이나, 1987년 여름에도 무역 적자는 계속 늘어만 갔다.

1987년 10월 14일 미국 정부가 발표한 8월 무역 수지는 전월의 165억 달러 적자 보다 개선되었음을 보여주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우 지수의 95.46포인트(3.8%) 하락을 가져왔다. 이는 블랙 먼데이가 일어나기 전주의 수요일이었습니다. 다우 지수는 목요일과 금요일에 각각 2.4%와 4.6% 하락했다. 1987년 10월 14일부터 19일까지 4일 동안 S&P 500 지수는 28.5% 하락한 한편, 다우 지수는 30.7% 하락했다.

다른 연구에 따르면, 이 4일간의 하락은 기업 인수 합병의 자금 조달에 사용된 부채에 대한 금리 인하를 제한하는 법안이 의회에서 발의된 것과 동시에 일어났다. 이 법안은 10월 13일에 발의되었으며, 10월 15일 하원 세입 위원회에서 승인되었습니다. 법안은 결국 폐기되었지만, 1987년 기업 이익이 급증하면서 기업 주가 수준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업 이익에 대한 지속적이고 강한 성장 전망은 S&P 500의 PER 배수를 급상승시켰고, 이에 따라 주가를 새로운 최고치까지 끌어올렸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쉴러의 월간 데이터에 따르면, S&P 500 PER 배수는 1881년에서 1987년 사이 평균 약 15배였고, 1985년 8월에서 1987년 8월 사이에는 11배에서 18배로 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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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시장 붕괴 사건의 기념일을 맞아, 현재의 강세장이 비슷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을까? 차후 1987년과 2017년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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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팩트셋의 “Marking 30 Years since the Stock Market Crash of 1987”을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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