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시작된 혁명 - 5단계의 시대로 본 금융 시장의 역사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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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400년 동안 금융 시장의 역사는 4단계의 시대로 나눌 수 있다. 각 시대마다 경제 및 정치적 요인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장의 규모와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 .정치와 경제는 기업의 상장 요건을 규정하거나, 금융 시장의 자본 흐름 통제하거나, 기업들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규제 수준을 결정하는 등 금융 시장의 한계를 정해왔다.

첫 번째 시대는 1600년부터 1815년까지였다. 당시 금융 시장은 정부 국채와 소수의 국영 독점 기업들 만이 시절이었다. 1600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된 후 200년 동안, 금융 시장에서 거래되던 유가 증권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1719-1720년 거품이 붕괴된 후 이후, 주식은 채권처럼 거래되었다. 투자자들은 주가 상승을 통한 이익보다는 안전한 수익에 더 관심이 있었다.

1815년부터 1914년까지가 두 번째 시대로, 주식 시장이 확대되고, 금융 시장은 세계화되었으며, 주식에 비해 국채의 중요성의 줄어든 시절이었다. 1790년대, 처음 운하가, 다음은 철도가 금융 시장의 성격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

투자자들은 운송 관련 주식에 투자해 믿을 만한 배당금뿐만 아니라, 주가 상승을 통해서도 수익을 올렸다. 이후 100년 동안, 이 같은 주식이 수 천 개로 늘어났다. 1914년이 되자, 유럽과 세계 다른 여러 나라들을 통해 자본이 자유로이 흘러 다녔고, 투자자들은 전 세계에 투자해 수익을 최적화할 수 있었다.

이 세계화된 금융 시장의 시대는 1914년 7월 31일로 막을 내렸고, 세 번째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세계 금융 시장은 문을 닫았다. 전쟁 동안, 모든 자본은 오로지 전쟁을 위해서만 쓰였다. 종전 후, 금융 시장의 세계화가 다시 시도되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금융 시장은 세계적 수준이 아닌 국가적 차원으로 줄어들었다.

1차 세계대전 전에는 전 세계 시장이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장마다 비슷한 수익을 제공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수익이 가장 높은 나라로 자본이 흐르지 못하게 되자, 나라마다 주식 시장 수익률이 달라지게 되었다. 이어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럽에서 많은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었고, 미국은 산업을 규제했다.

1980년대가 되어서야 규제 완화와 민영화의 물결이 전 세계 주식 시장에 몰아쳤고, 다시 한 번 세계화가 진행됐다. 1970년대 OPEC 발 원유 위기가 시장과 경제에 불어닥쳤고, 경제를 규제하는 정부의 역할을 문제로 떠올랐다. 민영화는 자본주의 경제를 휩쓸었고, 이전 공산주의 국가들도 주식 시장을 개방해 세계 금융 시장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세계 시가총액/GDP 비율 또한 급격히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 시점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1981년 채권과 주식 시장의 약세장 저점을 새로운 네 번째 시대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 네 번째 시대가 끝나고 다섯 번째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오로지 기술 발전에 달려 있다. 다섯 번째 시대의 금융 시장은 국가별 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며, 단지 세계화된 시장이 아니라, 오로지 단일 시장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모든 금융 자산은 전 세계를 연결한 컴퓨터 네트워크 상에서 하루 24시간 거래될 것이다. 외환 시장의 경우, 거의 이 지점에 도달해 있고, 다른 금융 자산들이 이 지점에 도달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첫 번째 단계의 금융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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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대 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면서 금융 시장에 혁명이 일어났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01년 설립되어, 1799년까지 운영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600년에 설립되어, 3차례 재편이 이뤄졌고, 1657년 4대 동인도 회사로 변신했으며, 1874년까지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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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이전, 상인들은 동방과 무역하는 상선의 “지분”에 투자했다. 여러 척의 상선에 나눠 투자함으로써, 한 척이 난파되었을 경우의 위험을 분산시켰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등장하자, 개별 상선이 아닌 회사의 소유권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혁신이었다.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졌고, 회사에 투자함으로써, 한 상선에서 다른 상선으로 투자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효과가 생겼다. 1600년대 금융 시장 혁명이 중요한 이유는 회사를 설립해 소멸 기한 없는 주식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 주주들은 이 주식을 다른 이들과 사고팔 수 있었고, 회사가 이익을 남길 경우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미래 기업들이 교훈으로 삼을만한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이 회사의 주식은 시 당국이 할당했기 때문에 거래가 제한적이었다. 또한 신주 발행 대신 부채로 자본을 조달함으로써, 부채 비율이 높아졌고, 결국 파산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게다가, 배당금도 종종 현물로 지급했다. 주주들은 현금 대신, 서인도에서 들여온 정향으로 배당금을 받았다. 상인들이야 정향을 현물로 받아 팔게 돼서 좋았지만, 단순 투자자들은 현금 지급을 더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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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의 명예혁명으로 영국 위회가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입헌 군주제를 수립했다. 이 사건으로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이 왕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자본과 금융 지식이 영국으로 건너왔다. 이후 1690년대에 들어서자, 회사 설립의 두 번째 물결이 일어났다.

1688년의 암스테르담 금융 시장은 런던 시장보다 더 정교했다. 1688년에 출간된 조셉 드 라 베가의 책 “혼돈 속의 혼돈(Confusion de Confusiones)”은 암스테르담 유대인 사회를 통해 주식 시장의 내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윌리엄 핍스 원정대가 1687-1688년 원정의 결과로 주주들에게 10,000%의 배당금을 지급하자, 다른 기업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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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존 호튼이 주식 거래에 관한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1698년 1월, 런던 주식 시장 소식지 “Course of the Exchange”가 격주로 발행되면서, 런던 커피점들에서 수집한 주가가 게재되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에도 비슷한 소식지 “Amsterdamsche Courant”가 있었고, 1723년부터 격주로 주가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파리의 경우, “Les Affiches de Paris”가 1745년 파리 주식 시장의 주가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중반이 되자, 금융 시장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금융 언론 또한 성장했다.

1600년대와 1700년대 유럽에서는 전쟁이 계속되었고, 그 결과 영국, 네덜란드 및 프랑스의 부채는 쌓여갔다. 네덜란드와 영국 정부는 만기가 더 긴 국채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사망 시까지 매년 연금을 지급하는 연금보험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채권형 투자 상품은 결국 동인도 회사나 영란은행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만기가 도래하지 않는 주식으로 전환되었다. 이 주식은 영국 정부로부터 일정한 이자를 받고, 동인도 회사로부터 가변적인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돈을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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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금융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719년~1720년의 거품이었다. 위 차트에 나타난 것처럼, 영국 주식의 시가총액은 1688년부터 1720년까지 꾸준히 상승했다. 네덜란드, 프랑스 및 영국 정부 모두는 1701년에서 1713년 사이 스페인 승계 전쟁 비용으로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존 로의 조언으로 국채를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주식으로 전환했다. 영국에서도 투자자들이 보유 국채를 사우스시 컴퍼니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게 허용했다. 주식 투자의 광풍이 주가를 지속할 수 없는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1720년 거품이 붕괴된 이후, 기업들의 신주 발행이 제한되었고, 나머지 1700년대 동안 신주를 발행한 기업은 거의 없었다.

투자자들은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원했고, 1719-1720년 거품 이후, 정부가 담보하는 독점적 유가증권인 국채 만이 안전한 투자 대상으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금융 자본은 국채로 흘러들었다. 거품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기업들의 주식도 채권처럼 움직였고, 주가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 규모는 1688년 100만 파운드에서 1789년 2억 4,400만 파운드, 1815년 7억 4,500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영국 주식 시장의 시가총액은 1688년 100만 파운드에서 1789년 3,000만 파운드, 1815년 6,000만 파운드 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1688년 국채 발행 규모와 같았던 영국 주식 시장의 시가총액은 1815년이 되자 국채 규모의 10% 아래로 줄어들었다. 영국은 정부의 담보를 바탕으로, 1815년까지 부채를 GDP 대비 2배까지 늘릴 수 있었고, 국채 금리는 1701년 8%에서 1729년 3%로 떨어졌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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