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가격이 1979년 초 5달러에서 51달러까지 치솟자, 은 시장이 혼란에 빠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 금융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치과 병원과 티파니 같은 보석 업체뿐만 아니라, 사진 현상에 은을 사용하는 코닥 같은 사진 업체들은 고작 1년 전 대비 10배의 가격으로 은을 사야 했다.
티파니는 뉴욕 타임스에 헌트 형제가 은 시장을 조작하고 있다는 비난의 광고를 싣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 미국인들은 은 러시에 몰려들었다. 전국적으로 집안 가보를 비롯해 은으로 된 온갖 제품이 보석점으로 밀려들었다.
미국 정부가 1964년 생산을 중단한 은화 수백만 달러 상당이 코인 가게에 팔렸다. 이로 인해 수천만 달러 상당의 은이 시장에 풀렸다. 은화와 은 제품은 잉글하드 실버(Englehard Silver)가 매입해, 공인 은괴로 제작했으며, 다시 헌트 형제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헌트 형제의 은 가격 조작 혐의에 대한 재판을 다룬 마크 사이모(Mark Cymot)의 책 “스퀴징 실버(Squeezing Silver)”를 보면, 1979년부터 1980년까지 헌트 형제가 COMEX와 CFTC와 벌인 전투의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이들 상품 규제 당국은 헌트 형제에게 은 포지션을 줄이라고 요구했고, 헌트 형제는 그러기로 약속했으면서도 뒤로는 은 보유 규모를 더 늘렸다.
헌트 형제가 사용한 한 가지 술책은 세금을 이연 시키는 것이었다. 1979년에 은 선물 계약을 매도하면 연말에 소득세를 내야 했기 때문에, 매도를 1980년 1월로 미룸으로써, 양도 소득세 납부를 연말까지 미룰 수 있었다.
거래소는 헌트 형제에게 1월까지 은을 처분하라고 했지만, 형제는 앞으로는 은을 팔고, 뒤로는 보유고를 더 늘렸다. 1980년 1월 18일, 은 가격이 전년도 대비 10배가 오른 50.35달러를 기록했다. 헌트 형제는 수십억 달러의 이익을 실현했다.
(당시 뉴욕 타임스 기사)
COMEX는 전년도에 비해 헌트 형제의 은 시장 투기를 크게 제한했다. 1월 7일 COMEX는 은 거래 규칙 7조를 적용해 은 선물 계약 보유 한도를 300만 온스로 제한했다. 그럼에도 헌트 형제의 탐욕은 멈추지 않았다. 1월 21일 시카고 상품 거래소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신규 은 선물 계약 발행을 중단시킨 것이다.
거래소를 통한 은 매수가 사실상 중단되었다. 트레이더들은 기존 계약을 해지할 수만 있었을 뿐, 신규 계약을 체결할 수 없었다. 즉, 은을 팔수만 있었지, 살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헌트 형제는 CBOT가 누구나 사고팔 수 있는 시장을 팔 수만 있는 시장으로 바꾸면서, “게임의 규칙을 바꿨다.”라고 비난했다. 분명 이 점에서는 헌트 형제의 비난은 맞는 말이었다.
가다피가 리비아의 원유에 관한 규칙을 바꿨듯이, CBOT는 미국의 은에 관한 규칙을 바꾼 것이다. 그 영향은 즉각적이었고, 은의 가격은 하루 만에 10달러나 추락했다. 은 선물 계약 또한 1980년 1월 3일 30만 건 이상 거래되던 것에서, 1월 25일 단 12,000건으로 줄었다.
1980년 3월 14일, 연준 의장 폴 폴커(Paul Volker)는 은행들에게 투기 목적의 자금 대출을 제한하라고 요구했다. 일부분, 손실 감당을 위한 헌트 형제의 자금 대출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추가의 자금 대출이 막히자, 증거금 납입에 곤란이 생겼다.
헌트 형제는 3월 31일 마감일까지 잉글하드 실버에 은 1,900만 온스 인도분 상당의 6억 6,500만 달러를 납부할 의무가 있었다. 헌트 형제에게는 그만한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은행들에 파산을 신청하기로 했다.
헌트 형제는 은 포지션을 유지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빌렸지만, 이제는 몇 억 달러로 빌릴 수 없었다. 게다가 은 가격도 붕괴되었다. 바체 그룹(Bache Group)은 1980년 3월 25일 손실 충당을 위해 1억 달러의 담보금을 요구했지만, 헌트 형제의 수중에는 현금이 없었고, 채무 불이행에 처했다. 바체 그룹은 헌트 형제의 은 선물 계약을 반대매매할 수밖에 없었고, 은 가격은 1980년 3월 12일 30.80달러에서 3월 25일 21.25달러로, 다시 “은의 목요일”인 3월 27일 10.80달러로 붕괴되었다.
(헌트 형제의 은 가격 조작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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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바체 그룹이 이렇게 손실을 보면서 은 선물 계약을 매도하다가는 파산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헌트 형제에게 자금을 빌려준 회사들이 파산하게 된다면, 이후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얼어난 것과 비슷한 시장 붕괴와 경기 침체가 일어날 수 있다고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헌트 형제에게 자금을 빌려주 회사들을 구제하기 위해, 은행 컨소시엄은 10억 달러를 지원해 헌트 형제의 은 선물 계약을 질서 있게 처리하도록 했다. 헌트 형제에게는 플래시드 오일(Placid Oil)의 지분을 담보로 11억 달러의 대출이 집행되어, 바체 그룹에 상환토록 했다.
그 여파
페루의 은 회사 민페코(Minpeco)는 1979년 선물 시장에서 은 선물 계약을 매도하고 있었다. 이후 은 가격이 폭등하자 상품 거래소는 추가 증거금을 요구했고, 민페코에게는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1억 달러까지는 어떻게 충당했지만, 더 이상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은 무리였다. 따라서 손실을 무릅쓰고 은 선물 계약을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1988년 민페코는 헌트 형제를 고소했고, 6개월간의 재판 끝에, 은 시장 조작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서, 보상으로 1억 3,400만 달러를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헌트 형제에게 이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파산에 이를 넬슨 벙커는 목장의 말 500마리, 로마 및 그리스 시대 주화, 그동안 모아온 다른 수집품들이 경매에 넘겨졌다.
(법정에서 넬슨 벙커 헌트와 지켜보는 라마르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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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에서 유전을 발견한 후인 1960년대 넬슨 벙커 헌트의 자산은 160억 달러에 달했지만, 1988년 온갖 소송이 종결되자 1,000만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이후 7년 동안도 이 돈으로 다른 채권자들의 빚을 갚으면서 보냈다.
상원은 헌트 형제가 은 시장에 불러일으킨 혼란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고, 그 과정에서 한 상원 의원이 넬슨 벙커 헌트에게 어떻게 하면 10억 달러를 날릴 수 있냐고 물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10억 달러가 엄청난 돈이었던 35년 전이었다는 점이다. 넬슨 벙커 헌트는 느릿느릿한 전형적인 텍사스 말투로 “글쎄요 상원 의원님. 10억 달러가 예전만 못하잖습니까.”라고 답했다.
자료 출처: Global Financial Data, “A Billion Dollars Just Ain’t What It Used to Be”
※ 이후 넬슨 벙커 헌트는 평생 상품 선물거래를 금지당했고, 1988년 5억 달러의 부채를 진 채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 당시 헌트의 파산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개인파산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2014년 10월 21일 알츠하이머 투병 끝에 미국 댈러스의 노인 보호 시설에서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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