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파르남 스트리트의 “Zero — Invented or Discovered?”를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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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해 보이지만 질문하나 해보자. “0”이 발명된 것인지 아니면 발견된 것인지 생각해본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왜 이것이 중요하지?
하지만 이 질문에 답을 하는 모습에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발명된”이란 인간이 ”0“을 만들었고, 그러지 않았으면 “0”과 그 속성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의미다.
“발견된”이란 인간이 이 기호를 창조하긴 했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그 의미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0”을 순전히 수학적인 기호로 생각하고, 이 생각을 확대해 모든 수학을 인간의 창조물, 예를 들어 치즈 또는 자율 주행차 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아니면, 수학, 특히 “0”이 세상을 표현하는 상징적 언어로서, 그 의미가 우리가 표현하는 것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오늘날 “0”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구성 요소이다.
“0”의 개념은 아주 기본적인 것이라서 통상 유치원에서 배우게 된다. “3 - 3 = 0”이라는 식을 생각해 보라. 전혀 복잡하지 않다. 이 기호로 “공(空)”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제2의 천성이다. 2017년인 지금에는 아주 상식이며, 너무 일반적인 거라서 “0”이 숫자 체계에 비교적 나중에 추가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대부분에게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0”은 실제로 수학보다 더 젊다는 것이다. 직각 삼각형의 빗변의 길이는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0”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도출되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도 마찬가지다.
정말일까? 오늘날 수학, 전산, 언어 그리고 삶에서 “0”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거짓말처럼 들린다. “공(空)” 또한 숫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고도 어떻게 복잡한 삼각형의 기하학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수: 과학의 언어(Number: The Language of Science)”에서 토비아스 단치히(Tobias Dantzig)가 이에 대해 설명해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현실적 사고방식에서는 “공(空)”이라는 개념을 숫자로 생각해, 여기에 기호를 부여할 수 없었다.” 이 설명은 위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좋은 길잡이가 된다. “공(空)”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먼저 그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는 힌트를 주기 때문이다. 이 “공(空)”도 차지하는 공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대에서 상업 거래를 위해 숫자 “0”이 발명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빈자리를 위한 특별한 기호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65나 605 또는 6050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0”은 특정 장소의 “단위 없음”을 나타낸다. 즉, 6050을 “0” 없이 표현하면, 6천, 백 자리 없고, 5십, 단 자리 없음이 된다.
대단하지 않은 독창적인 통찰이 우연히 생겨났고, “0”은 전 세계로 퍼졌다. “0”은 가지고 있는 곡물이 몇 부대인지, 또는 군대에 군인이 몇 명이나 있는지 기록할 수 있는 편리함은 물론, 우리의 숫자 체계를 아주 효율적인 십진법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전에 있던 어떤 (많은) 숫자 표기법보다, “0”은 다른 숫자의 힘을 바꿔놓았고, 수학을 환상적인 방정식으로 발전시켜 우리 세계를 설명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놀라운 과학적 및 기술적 진보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사에 잃어버린 고리가 존재한다.
“공(空)”이라는 의미에 기호를 부여함으로써 인류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도 숫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타당한 생각인가? “0”의 특징을 감안할 때, 빈자리 기호로 처음부터 “0”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공(空)”을 정의해 “0” 안에 내재시키고, 빈자리 기호로 사용했을까?
“0을 찾아서(Finding Zero)”에서 아미르 악젤(Amir Aczel)은 통찰력을 준다. 기본적으로 그는 “0”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 안에 내포된 “공(空)”의 개념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들은 이미 자신들에게 익숙한 개념에 기호를 부여한 것이었다.
그는 현재 캄보디아 지역에서 서기 683년에 만들어진 석판을 발견했는데, 그 석판에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0”을 발견했다.
악젤은 “0”을 찾아 나선 여정에서 서양 또는 아랍 문화권보다는 극동 지역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철학적 및 종교적 깨달음 때문이었다.
서구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여러 면에서 이분법적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선과 악, 마음과 몸, 친구와 적, 애국자와 테러리스트로 이분하는 것이 그렇다. 서구인들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세계를 이진법에 맞춰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무언가가 “A”라면, “A가 아닐” 수는 없는 것이다. “A”의 정의는 “A가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양자 모두일 수는 없다.
악젤은 이런 이원성은 수많은 동양 사상에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썼다. 그는 초기 불교 논리에 담긴 “사구분별(catuskoti)”에 대해 설명한다. 어떤 상태에는 2가지가 아니라 4가지 가능성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즉 유, 무, 역유역무, 비유비무가 있다는 의미다.
전형적인 서구식 사고방식에서는 이런 종류의 논리가 이상할 수 있다. 내 아버지는 대머리 이기도 하고, 대머리가 아니기도 하다. 둘 다가 아닐 수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두 가지 다른 거의 무의미한 선택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지만 서구의 언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분법에 국한되지 않은 표현이 이해되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타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우리의 친구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이 말을 “나는 여러분의 친구이자, 적이다.”라고 해도 될까? 그렇다. 원칙적으로는 친구지만, 자기에게 반할 때는 적이라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자신의 가치관에는 반하지만 지지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의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니다.”라는 말은 문제가 있는 부문에서는 지지하지 않지만, 문제가 없어지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감정은 특히 이분법으로 나누기에는 부족한 영역이다. 전통적인 이분법적 사고에서도 아이들을 바라보면, 동시에 행복할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다. 그리고 “0” 자체는 이분법적 분류를 무시한다. 무언가일 수도 있고 동시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악젤은 불교 승려와 가진 대화에 떠올린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을 감싸고 있는 것 밖에도 항상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것은 생각일 수도, 아니면 일종의 “공(空)”일 수도, 아니면 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여기에 숫자 “0”의 지적 근원이 있었다. 그것은 불교의 명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깊은 성찰만이 이 생각이 출현할 때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숫자의 절대적 “공(空)”과 같을 수 있었다.”라고 결론짓는다.
즉, “0”의 특별한 속성은 기호로서 불리기 전에 이미 개념적으로 이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空)”은 나타낼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오늘날 우리가 “0”을 대하는 것과 일치한다. “0”은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도 특성이 있다. 그리고 그 특성을 조사해 보면, “공(空)”에 힘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그것이 우리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0”은 존재에 대해서도 가르쳐 준다. 우리가 “공(空)”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의 일부인 기호로서 “0”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생과 사의 이분법 밖에서 움직이고 있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고, 그 의미를 개념화하는 다른 방법들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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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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