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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이후, “자유주의 국제 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 LIO)의 종식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최근 이 주제에 관한 몇 권의 서적이 출판되었으며, 일반적 견해는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포기하고 있고, 세계화가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포기하지 않았고, 다른 것 때문에 LIO가 끝나가고 있다는 다른 시각도 있다.
이 글에서는 1945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이 어떻게 세계를 관리했는지 살펴보면서, “선의 패권 국가(Benevolent Hegemon)” 또는 LIO와 반대되는 새로운 “악의 패권 국가(Malevolent Hegemon)”에 대해 알아본다. 오바마 행정부 하에서 LIO가 퇴보하기 시작했지만, 새로운 체재가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트럼프 행정부가 새로운 패권 국가의 모델을 만들고 있어 보인다.
1부에서는 패권 국가의 기본에서 시작해, 선의 패권 국가로서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하 살펴본다. 2부에서는 미국이 이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델을 모색하고 있는 이유를, 3분에서는 악의 패권 국가로 묘사되는 새로운 모델에 대해 분석하고, 두 모델의 차이점을 알아본다.
### 패권 국가의 기본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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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 국가는 전 세계에 두 가지 공공재를 제공한다. 첫째는 안보다. 패권 국가라 전 세계 해상 무역로를 보호하고, 국지적 전쟁이 대규모로 진화하지 않게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갖춘 국가를 말한다.
둘째 공공재는 경제적인 것이다. 패권 국가는 나머지 다른 국가들이 무역에 사용하는 기축 통화를 제공한다. 이를 위해 패권 국가는 지속적인 무역 적자를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과거 금본위제 하에서는 패권 국가가 금 부족을 겪게 되었고, 경제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같은 초기 패권 국가들 중 일부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금과 은을 유출해 나가면서 이 역할을 유지했다.
모든 유럽 패권 국가는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를 통해 귀금속(1400년대의 원동력)과 말 잘 듣는 노동력을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 군사 기지를 건설함으로써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본국의 수출을 확대할 수 있는 소비자 시장과 해외 투자를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선의 패권 국가
미국은 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1815년 이래로 세계 초강대국 자리에 있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약해진 영국도 강력한 사례로 들 수 있다. 실제 일부 학자들은 영국이 패권 국가 역할을 유지할 능력이 줄었고, 미국이 그 부담을 받아들이길 꺼렸던 것이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주요 원인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트루먼 대통령은 3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는 세계 질서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미국이 패권 국가로 올라서기 위해 개발한 공식은 근대 역사상 아주 독특했다. 미국은 모델은 식민지 건설을 “반미국적인(Un-American)” 것으로 여긴 것이었다. 미국이 독립 전쟁에서 식민 통치 권력을 이기고 하나의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식민지 건설은 미국에게 잘못된 행동으로 인식되었다. 그렇다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식민 정책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지만, 결정에 보편적인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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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차트는 1400년대 이후 세계 패권 국가의 변천을 보여준다. 미국을 제외하고 모두가 식민지를 건설한 국가였다. 미국은 강압으로 식민 통치를 실시하는 대신, 다른 국가들을 자신의 패권 아래 끌어들일 수 있는 체재를 설계했다.
기본적인 요소는 다음과 같다.
공산주의의 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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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케넌의 “장문 전보(long telegram)”가 미국 국민들에게 미국의 패권을 인식시킨 핵심 요소가 되었다.
미국은 공산주의를 악의 체재로 간주하면서, 공산주의 국가들을 봉쇄하고, 이데올로기 확산을 막기 위한 연합을 결성했다. 미국은 단순하게 소련과 전쟁을 벌이는 대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우월성이 결국은 승리할 거라는 생각이 오래 지속되도록 정책을 설계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 자신이 먼저 월등한 자본주의 민주 사회를 건설해, 국가 차원만이 아닌 국민 차원에서도 경쟁 우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즉, 자국의 생활 수준을 훨씬 높임으로써, 대다수의 주요 국가들이 자유세계의 일환이 되고 싶어 하고, 공산주의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것이 미국의 목적이었다.
핵심 분쟁 지역 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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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곳의 분쟁 지역을 고착화시키는 것이 미국의 무언의 정책이었다.
첫 번째 지역은 해결책이 보이지 않던 “독일 문제”의 유럽이었다. 독일은 지리적 위치로 인해 경제의 중심이 될 터였다. 또한 유감스럽게도, 북유럽 평원에서 동서로부터 침략에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다. 유럽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생했던 것이다. 미국은 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나토(NATO)를 통해 유럽 국가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국방력을 이어받았다.
두 번째 분쟁 지역은 극동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일본은 천연자원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대형 산업화 국가로 발전했다. 섬 국가의 특성상 원자재 수입이 끊길 수 있는 해상 차단에 언제나 취약했다. 실제, 제국주의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의 원유 금수 조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일본은 하와이의 미국 해군 기지를 공격함으로써, 네덜란드의 동인도를 공격해 그곳에서 유전을 확보할 시간을 벌길 바랬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을 무장해제시키고, 항로를 확보해 주었기 때문에, 일본은 더 이상 무력을 행사해 원자재에 확보에 나설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더 이상 일본은 주요 수입 물품 공급이 끊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인접 국가들은 원자재 확보를 위한 일본의 침공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세 번째 분쟁 지역은 중동이었다. 미국은 중동 지역 국가들이 여전히 식민 시대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명목상의 국가일 뿐이라고 이해했다. 과거 식민 세력들은 의도적으로 이 지역을 소수의 그룹에게 맡겼고,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식민 정부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미국 또한 이들 국가들을 자주적으로 발전하게 놔두면, 서로 간에 갈등을 낳을 것이고, 소련이 이 지역에 들어와 유전 지대를 접수할 기회를 안겨주는 꼴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기존의 국경선을 인정했다. 잔인한 독재 정권을 그냥 묵인한 행동이었다. 트루먼 행정부와 이후 정부들은 미국의 패권 유지의 일환으로 이 세 곳의 분쟁 지역을 고착화시켜 관리해 왔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세계 안보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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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분쟁 지역을 “고착화”시킨 것 외에도, 미국은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반적인 군사 안보를 제공해 국지전적 전쟁이 대규모로 진화하지 않도록 막았다.
이 역할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 첫째, 미국은 동맹 국가에 공군 및 해군 기지를 건설했다. 이를 통해 분쟁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동시에, 미국이 군사력 투입과 질서 유지를 가능하게 했다. 동맹 국가들이 자국 영토에 미군 주둔을 허용했던 부분적인 이유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무역 시스템(아래 참조)에 참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과거의 패권 국가들과는 달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았다.
둘째, 동맹 국가 내 군사 기지는 미국에게 세계의 여러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에는 서반구에서 미국에 적대적인 정부가 권력을 잡아 지하디스트 지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세계 해상 항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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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전 세계 어디에든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곳곳에 해군 기지를 건설했다. 해상의 주요 요충지를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게 함으로써, 세계 무역이 번성할 수 있었다,
기축 통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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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944년 브레턴우즈에서 달러/금 준비 제도를 창설해, 자유세계에 안정적인 수요 원천을 제공하고, 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회복할 수 있게 했다.
이를 통해 최후의 수입국 역할을 하게 되었고, 국가의 재건과 성장을 위한 최선의 길은 미국의 소비에 의존해 수출을 확대해 나가는 것임을 확실하게 해주었다. 미국 소비자에게 제품을 팔아 일본 및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이 다시 일어섰고, 한국과 대만이 발전했다.
이 체재가 유지되기 위해 미국이 계속된 무역 적자를 수용해야 했다. 미국과 나머지 세계의 상대적인 규모 차이가 처음에는 너무 컸기 때문에 기축 통화로서 달러 공급의 영향은 미미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이 되자, 유럽으로의 달러 공급은 너무 커진 나머지, 유럽 정부들, 특히 프랑스 정부가 달러 대신에 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닉슨 행정부는 금 고갈 가능성이 대두되자, 1971년에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이를 통해 세계 금융 시스템이 살아났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여전히 달러는 기축 통화 역할을 했고, 준비 제도는 미국 달러/미국 국채 체재로 진화했다. 미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기록한 외국 정부들은 이제 금 대신에 이론상 무제한 생산이 가능한 미국 국채를 보유하게 되었다.
다자간 무역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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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자유세계 무역 체제를 개방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은 세계 무역기구(WTO)로 발전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양자간 협정에서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에게도 자유세계 무역 체재에 가입할 명분이 충분했다. 미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다국적 체재의 규칙을 받아들여 미국의 힘을 줄일 수 있다는 의도였다. 이어 벌어진 상황 중 하나가 관세율 하락이었다. 아래 차트는 미국의 수입 관세율 추세를 보여준다.
세계의 관세율 또한 일반적으로 하락했다.
다자간 무역 협정이 미국의 주권을 약화시켰다고는 하지만, 자유세계를 하나로 묶어 공산주의 세계를 고립시키는 체재로서 유용했다. 다자간 무역 협정과 달러 블록이 결합됨으로써, 공산주의 체제는 큰 불이익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소련이 루블을 기축 통화로 한 금융 체재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들 간의 무역의 대부분 물물 교환을 통해 이루어졌다. 트루먼 계획이 효과를 보인 것이다. 또한 미국과 동맹국의 체재가 소련의 공산주의 모델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냉전은 3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키지 않고 끝났다.
미국이 다자간 무역 협정에 가능한 한 많은 국가들이 참여할 수 있게 이끈 결과였다. 반면 소련은 국가들을 공산주의로 끌어들이는데 고충을 겪었다. 소련-중국-동구권 공산 국가들 이외에 유일하게 공산주의가 된 국가는 쿠바였다. 하지만 쿠바는 소련의 전초기지라기보다는 짐이 되었다는 것이 더 맞다. 미국은 실질적인 “당근책”으로 여러 나라를 자유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렇다고 군사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그리고 남미에 개입했던 사례들이 간접적이고 무형의 영향력이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직접 행동에 나섰던 사례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특히 과거 패권 국가들의 행동과 비교할 때, 미국은 그들보다 덜 강압적이었다. 따라서 미국을 ‘선의 패권 국가’로 보는 이유가 여기 있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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