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적어놓은 하나의 기록물이다. 뉴욕 타임스는 “‘지면으로 다룰 수 있는 뉴스라면 모두 다룬다(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라고 말한다. 신문에는 논설에서부터 비극적 사건에 대한 기사 그리고 독자 의견에 이르까지 다양한 글이 실린다.
대화 중에 한 마디라도 하려면 신문을 읽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신문을 일종의 문화 자본이라고 불렀다.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시사 문제에 능숙해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다.
물론, 종이 신문의 전성기는 이제 지났다. 인터넷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신문사들은 온라인으로 전환하거나, 사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젊은이들이 커피숍에서 신문을 읽는 모습은 드문 일이 되었고,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는 모습이 더 흔해졌다. 하지만 이러 저런 다른 형태로 계속 존재할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그래왔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신문의 나이는 정확히 몇 살일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분명 정보로서 뉴스는 안전이나 재미 같은 목적으로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유되어 왔을 것이고, 아마 우리 언어와 같이 태어나 오랫동안 같이 자라왔을 것이다.
수천 년 전 호모 사피엔스들은 서로 협력해야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 동안 그런 정보는 입소문으로 퍼졌을 것이다.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해 서로 정보를 공유했고, 여행자들 이곳저곳을 이동하면서(종종 안전한 통과를 위한 필수 요건으로) 뉴스를 전했고, 이런 접촉이 잦아지면서, 개개의 지역 사회를 하나의 큰 사회적 공동체로 엮어주었다.
글로 된 뉴스는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에서는, 관리들이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라는 일일 회보를 발행했다. 여기에는 그날의 사건들과 공표 내용이 담겨있었다.
칼리굴라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에는, 황제가 언제라도 공표 내용을 마음대로 바꾸기 위해, 회보를 아주 작은 글씨로 쓰고 그마저도 로만 포룸 기둥 높은 곳에 붙여놓아 맨눈으로는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모습에서 아주 옛날부터 신문 스스로가 일부러 사실을 감추고, 권력자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정보의 확산을 막아왔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의 한나라 시절에도 황궁 관리들이 ‘디바오(官報; 관보)’라는 비슷한 회보를 발행했다. 이 회보에는 붓으로 쓴 정치 관련 정보가 담겨 있었으며, 오직 황궁 관료들만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중국에서 목판 인쇄술이 발명되었고, 디바오가 대량으로 인쇄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현대 신문과 악타 디우르나 또는 디바오의 정확한 차이점은 무엇일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신문은 다음 네 가지 기준에 맞아야 한다.
- 공공 대중이 접근할 수 있을 것
- 주기적으로 발행될 것
- 현재 정보가 담겨있을 것
- 광범위한 주제를 다룰 것
여기에 비추어 볼 때, 악타 디우르나나 디바오는 현대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정기적으로 발행되었고, (직접 또는 구두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지만, 주제의 범위도 제한되어 있었고, 발행 주체는 독립 신문사가 아닌 정부였다.
신문이 처음 언제 어디서 발행되었는지는 정확히 특정하기 어렵다. 역사는 애매하고, 이런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을 말해 주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학자들은 1450년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발명을 유럽에 인쇄 혁명이 시작된 역사적 순간으로 가리킨다.
유럽 언어들 중 소수의 문자만이 금속 활자의 혜택을 입긴 했지만, 인쇄의 효율성은 극적으로 향상되었다. 치음 인쇄업자들은 종교 관련 문서와 성서를 주로 찍어냈지만, 이후 장문의 뉴스가 담긴 문서들이 정기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했다. 미첼 아카이브에서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1665년에 발행된 옥스퍼드 가제트 1호를 첫 번째 신문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문은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문은 무엇보다도 지식을 보급했다. 이제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은 더 이상 권력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일반인들도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서로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 간에 대화가 잦아지자 서로 간의 관계도 더 가까워졌다.
사람들은 이웃뿐만 아니라 더 먼 곳에 있는 이들과도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먼 곳의 이방인들 그리고 같은 나라에 살지만 거리가 멀리 떨어진 이들과도 문화와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신문은 국가 자긍심의 중심 정보 매체가 되었고,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처럼, 신문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신문이 국가의 지식 독점에 저항했음에도, 역설적이게도 국가를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정보의 이동성은 국가의 효율성을 알아보는 한 가지 방법이다. 뉴스가 더 빠르게 전파되면 될수록, 국가의 네트워크는 더 잘 통합된다.
위르겐 하베마스가 ‘공공성의 구조 전환(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에서 주장했듯이, 신문은 공공 영역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접점이 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뉴스는 모두에게 즉시 퍼진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에서 긴급 재난 문자가 울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 특히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출현하면서, 공공 영역에서 신문의 역할은 축소되게 되었다. 오늘날 뉴스는 대부분 온라인상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파된다. 주위 사람들 중 어느 정도가 아직도 신문을 구독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적어도 하나씩은 소셜 미디어 계정을 가지고 있다.
신문은 현재 죽느냐 사느냐의 최악의 상황으로 나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올바른 정보 전달 기능은 꺼두고, 광고주의 이익에 영합하는 기사나, 심지어 가짜 뉴스의 원산지 역할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 점에서 신문의 몰락은 오히려 마땅하며,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신문은 이러 저런 다른 형태로 계속 존재할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그래왔듯이.
자료 출처: Marcus Dovigi in Medium, Farewell, Paperboy; The Rise and Fall of the News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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