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인플레이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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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인플레이션의 피해국 중 하나가 베네수엘라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의 경제학자 스티브 한케(Steve Hanke) 교수는 지난 수년간 곤경에 처해있는 각국 통화의 인식 제고에 훌륭한 역할을 한 연구에 매진해 왔으며, 그중 하나가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였다. 한케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율을 60,324%로, 볼리바르의 가치는 사실상 휴지 조각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베네수엘라 경제가 최고를 달리면서, 볼리바르 또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통화 중 하나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다소 비극적인 일이다.

베네수엘라가 사회주의를 시도했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고, 수많은 비극이 담겨 있는 기나긴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현재 베네수엘라의 괴멸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 또한 수십 년의 과정을 거쳐왔다.

1970년대: 베네수엘라 중앙은행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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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게도, 중앙은행 설립에 있어 베네수엘라는 거북이 같은 걸음을 걸었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제2차 세계대전 전야에 설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는 20세기 대부분을 금본위제로 보냈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베네수엘라에서는 원유 산업을 국유화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베네수엘라의 원유 국유화를 주도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즈 대통령은 철저한 개입주의자였다. 합리적인 국가 계획을 통해서라야 베네수엘라에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믿었다.

베네수엘라는 원유 국유화 이외에, 중앙은행도 정치화 시켰다. 페레즈 정부가 중앙은행의 민간 지분을 사들여, 정부 각료들을 중앙은행 이사회에 앉힌 것이다.

1970년대 정부 지출폭이 늘어나면서, 예산 적자가 높아지고, 부채는 쌓여가는 상황에서는 현명한 조치로 평가되었다. 이제 베네수엘라 정부는 허울만 독립 기관이었던 중앙은행을 꼬드겨 돈을 마구 찍어내도록 만들었다.

1980년대 인플레이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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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정부의 경제 확대 정책은 문제를 낳기 마련이었다. 1980년대에 이르자, 베네수엘라는 빚더미에 올라앉고 있었다. 20세기의 수많은 다른 국가들처럼, 베네수엘라 역시 금융 완화 정책에 기대어 방탕한 지출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운영해 나갔다.

베네수엘라의 금융 완화 모험은 곧 부메랑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1983년 베네수엘라 정부는 스스로 자초한 재정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례 없는 통화 평가 절하를 단행했다.

‘블랙 프라이데’로 전해지는 이 1983년의 평가 절하는 베네수엘라 역사에서 분수령 역할을 했다. 이제 베네수엘라에서는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이 일상이 되었다.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율이 한자리였던 적은 1983년이 마지막이었다.

1990년대 시장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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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즈가 다시 대통령에 오르면서, 1970년대 같은 정부 지출 프로그램을 재개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곧 베네수엘라의 경제적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이미 베네수엘라는 과도한 규제와 빚 더비, 그리고 국제 수준의 경쟁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페레즈는 IMF의 지침에 따라 시장 개혁에 나섰고, 민영화, 지방 분권화, 정부 보조금 삭감 및 관세 인하 같은 몇 가지 현명한 조치를 취했다. 유감스럽게도, 페레즈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내내 인플레이션을 다스리는 데 실패했다.

1989년 일명 ‘카라카소(Caracazo)’라고 부르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당시,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은 84%였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인플레이션은 평균 46% 정도였다. 계속된 인플레이션으로 통장이 잠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당연히 국민들은 개혁 정책의 실효성에 회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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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휴고 페리아는 베네수엘라의 개혁 사례를 1990년대 비교적 성공적으로 자유화로 전환했던 아르헨티나와 페루에 비교했다.

새로운 경제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승인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혁을 보다 신속히 진행하고, 성장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했다. 페루에서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의 재선, 아르헨티나에서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의 당선, 브라질에서 페르난도 카르도조 대통령의 당선 모두 빠른 경제 성장과 인플레이션 축소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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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국가의 성공 비결은 우선 인플레이션을 길들이는데 집중하고, 그러고 나서 기업들의 비용을 줄여주고, 강력한 국내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정책을 추구한 데 있었다. 꾸준한 성장을 통해 경제가 안정되자, 일반 국민들이 무역 자유화 같은 다른 시장 개혁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베네수엘라에는 유감이지만, 인플레이션은 사라지지 않았고, 페레즈의 실패를 이끈 요인들 중 하나가 바로 이 괴물이었다. 1992년 두 차례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정치적 긴장이 계속 고조되었다. 페레즈가 속한 민주 행동당이 그를 횡령 혐의로 탄핵했던 1993년이 티핑 포인트였다. 이제 명목상의 시장 자유화마저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이후 페레즈가 저질러 놓은 일은 베네수엘라 정부가 처리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베네수엘라의 마지막 민주 정부였던 라파엘 칼데라 대통령 치하의 1994년부터 1996년까지 평균 인플레이션율은 74%였으며, 최고치는 1996년 100%였다.

자연스럽게, 막 사면된 우고 차베스는 1990년대 베네수엘라의 경제 불안정을 이용할 수 있었고,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반체제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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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정권의 기초 경제학에 대한 완전한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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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운명의 장난인지, 차베스 대통령은 이전 정부와 동일한 반 성장 정책을 지속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속도로 확대해 나갔다. 막대한 정부 지출, 경제 통제, 금융 완화, 그리고 지속적인 몰수가 베네수엘라의 생산 능력을 산산조각 냈다.

베네수엘라의 시위가 전 세계적으로 보도된 무렵인 2014년, 인플레이션은 60%를 웃돌고 있었다. 베네수엘라는 2017년까지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져 있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지난해 말까지 통화 공급량을 두 자릿수로 늘리고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통화 공급량 증가는 앞서 언급한 60,324%라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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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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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크라트 시대의 중앙은행들이 마치 거실의 가구 같은 모습이 돼가고 있다. 아직까지 사람들은 중앙은행이 경제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지만, 조만간 비참한 영향 표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보통 너무 늦게 된다.

중앙은행이 지닌 파괴성은 자연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실제 중앙집권화라는 제단에서 숭배되는 보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표현이다. 지식인들이 베네수엘라의 위기를 어떤 방식으로든 합리화할지 모르지만,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이 신의 행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은 역병 같은 재앙이 아니다. 인플레이션은 정책이다.

자료 출처: Mises Institute, “A History of Venezuelan Inf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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